| II. 미술작품
임달이 미술사학을 신학적 테제를 빌어 설명한 것처럼, 미술작품 역시 다분히 초월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임달의 저작물에서 미술작품은 항상 자기 완결적인 존재이다. 즉 미술작품은 역사적, 사회적, 시간적인 맥락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인 것이다.
이때의 작품은 외적인 요소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내적 논리에 따라 의미를 발휘하는 ‘구조물(Strukture)’이다. 현대의 비구상미술은 이를 잘 보여준다. 구상미술과 달리 비구상미술은 스스로가 지시하는 외적대상(Gegenstand)이 없다. 오직 자신만을 지시할 뿐이고 단지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이런 미술작품은 스스로가 완결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보는 이로 하여금 떨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립되어 있지만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바로 개별작품 하나 하나가 고유한 세계가 있으며, 그 가치는 어떤 외적인 가치에 우선한다. 임달의 미술사학은 이런 개별작품의 존재성을 우선적으로 주목하는 것이다.
한편 미술작품의 존재성이 신학적 의미로 파악되었다는 것은 미술작품이 현존(Prasenz)적 의미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즉 개별적인 미술작품은 현재적 시점에서 의미있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임달은 미술사학에서 해석의 오류가 생기는 모든 원인은 미술사학자가 현재적 관점을 떠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4)
그에 의하면 미술작품이란 현재의 시점에서 의미 있게 경험되어지는 현상이어야 한다. 이러한 미술작품의 현존적 의미는 일반적으로 현대미술에서 경험되어 질 수 있다. 현대미술은 당대의 미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미술도 마찬가지로 현존적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즉 과거에 제작되어지고 전해진 미술들 역시 현재의 시점에서 의미있게 경험될 수 있다면 미술작품으로써 연구된다는 것이다. 임달은 자신의 주관심 분야가 현대의 미술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법을 과거의 미술에 적용하여 연구하였다.
임달은 현재적인 경험을 중시한 이같은 자신의 입장을 가다머(H. Gadamer)의 주장 즉 “작품의 이해는 과거의 지난 행위(Akt)에 관한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작용하고 있는 사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라는 주장과 통한다고 했다. 임달은 미술작품의 이러한 현재화 작업이 과거의 미술을 오늘날 의미있게 만드는 일로써 “역사와 화해하는 일”이라고 했다.5)
임달은 미술작품의 현존적 의미와 관련하여 미술연구자로서의 자신을 음악의 지휘자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임달은 미술작품을 일종의 악보로 간주하는데 음악이 악보자체로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연주됨으로써 비로소 존재(현존)할 수 있는 것처럼 미술작품도 해석작업(미술사학자에 의한 개념화 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미술사학자는 음악의 지휘자와 같이 미술작품이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데 기여하게 된다는 것이다.6)
임달의 미술사학에서 미술의 현존성에 대한 관심은 개별 작품에 대한 중시로 귀결된다. 이는 대부분의 그의 저술이 작품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그런데 종래의 미술사학은 미술작품의 개체성에 비해 미술의 일반성을 우위에 두는 경향이 강했다.
예를들어 양식사는 미술현상들이 기초개념들에 묶어 역사적으로 묶여 이해되지만 개별작품은 단지 그 고리에 따라 배열된다. 도상해석학 역시 미술작품의 의미를 미술외적인 컨텍스트에서 찾음으로써 개별작품의 자기완결적인 존재성을 주목할 수 없었다.
임달은 이러한 전통적 미술사학의 개념우위의 입장에 반해 개별작품의 존재성에 대한 규명을 중심과제로 설정한다.7) 그렇기 때문에 임달은 미술사 연구자체에 대한 의미를 결코 절대화하지 않는다. 미술사연구는 개별적인 작품의 존재의미를 파악하는 데만 유용하기 때문이다.
미술작품연구의 목적은 개별작품에 접근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이미 확립된 개념체계도 개별작품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다. 때문에 연구의 현장에는 완결된 이론이 있을 수 없고 항상 기성의 개념과 작품간에는 끊임없는 변증법적인 긴장관계가 있다. 다시말해 미술작품에 대한 연구는 작품을 정확히 보기 위한 과정으로써 중요한 것으로써 그 자체가 변화를 함축하는 상대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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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Imdahl, Max, Giotto Arenafresken, Ikonographie, Ikonologie, Ikonik, Munchen, 1980, p.110.
5) Imdahl, Max, “Bis an die Grenze des Aussagbaren”, 앞의 책, p.248.
6) Imdahl, Max, 앞의 글, p.249.
7) 그렇다고 임달이 미술의 일반성을 이해하는 작업에 무관심하지 않았다. 시대양식으로써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것 임달의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실제 몇몇 작품의 현존성의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현대미술의 개념을 정립하고자 시도했다. 예를들어 들로네회화의 동시성 원리가 보여주는 지각참여성, 뉴만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관람자의 자기한계성, 알버스 회화에서 보이는 모순적 화면성 등은 현대미술을 여타 양식과 구분지어 이해하는데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하지만 미술에 대한 유형적 관심이 임달의 중요관심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 유형화 역시 작품이해의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써 개별미술작품 이해에 결코 우선할 수 없다.
8) Boehm, Gottfried, “Die Arbeit des Blickes, Hinweise zu Max Imdahls theoretischen Schriften”, Max Imdahl, Gesammelte Schriften Band 3. Frankfurt am Main, 1996, pp.7-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