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일제 강점기의 미술관 박물관
우리나라의 미술관, 박물관의 역사는 유럽이나 서구의 그것에 못지않다. 로마 시대 사람들이 많은 무기나 보석, 또는 진귀한 동식물을 가정에 소 박물관 형식으로 진열하여 오늘날 동물원, 식물원 등 자연사 박물관의 효시를 이루었다면 우리역사에서도 이런 유형의 박물관의 사례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기 때문이다.2)
이는 우리 선조들의 문화에 대한 식견과 유물에 대한 보존과 수호의 의지가 남 달랐던 것에서 기인한다. 물론 이러한 문화적 자신들이 오랜 시간을 이어오지 못하고 화재와 병마 등으로 인해 소멸되어 기록으로 밖에 확인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조상들은 물론 자신들의 문화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지키고 후대에 전하려는 노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박물관 미술관에 대한 우리민족의 열정은 근대기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기에도 문화적 역량을 결집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양할 노력으로 황실은 지극 정성으로 노력하면서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관 박물관의 역사는 출발한다.
1. 창덕궁박물관
서구열강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까스로 국가의 틀을 유지해 오던 우리나라에서 근대적인 개념의 박물관으로서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1909년 11월 창경궁과 함께 일반에 공개한 ‘창덕궁 박물관’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이 우리나라에서 발족한 근대적 개념의 최고의 박물관이긴 하지만 이는 일제의 우리나라 강점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그들의 한국 황실을 모독하려는 저의가 반영된 것이었다.
1907년 7월 고종황제의 양위를 받아 경운궁에서 순종이 즉위하고 그해 11월 순종은 덕수궁에서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 무렵은 일제의 세력이 궁중내외를 장악하고 정치마저 일본관리와 친일내각에 의해 좌우되던 때이므로 고종황제의 강제양위에 이어 황제에 즉위한 순종은 부황인 고종과도 격리된 채 창덕궁에서 외롭고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는 황제를 위안하고자 하는 명분을 내걸어 민족정신의 지주이자 국권의 상징인 왕궁을 오락장으로 삼아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유산을 유린할 생각으로 그해 11월 6일 동물원, 식물원, 그리고 박물관의 창설을 지시하였다. 즉 당시 대한제국 궁내부 차관이었던 일인이 창경궁내에 박물관과 식물원을 건립하고 싶다는 뜻을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궁내부 대신 이윤용에게 제의함으로써 시작되었다.3)
이에 따라 창덕궁 안에 1908년 9월 어원사무국(御苑事務局)을 두고 동물을 구입하여 동물원을 출범시켰다. 이 당시 창경궁은 서쪽으로는 창덕궁과 인접하고 남쪽으로는 과거 동궁이 있어 이를 통칭 동 궁궐이라 하였다.4) 이 동 궁궐은 귀한 동물들을 기르는 동물원과 진귀한 식물들을 재배하는 식물원이 궁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순종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생각을 가급적 잊게 하고자하는 책략일 뿐 만 아니라 왕궁의 존엄성을 격하시키려는 계략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물원 시설은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한 이듬해 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가을까지 제 1단계 시설공사를 마무리하였다. 선인문안 보루각 터에 동물원을 짓고 각종 귀한 금수(禽獸)를 사육하여 9월 30일에는 대신들이 곰, 호랑이, 원숭이, 사슴, 공작과 학, 타조 등을 관람하였으며 춘당대 지역에는 식물원을 설치하였다.
1909년 11월(융희 3년) 창경궁 공개와 함께 식물원, 동물원과 동시에“창덕궁 박물관” 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일반인들의 관람이 허용되었고 권농장 터에는 연못을 파서 고기를 기르고 연꽃을 심고 춘당대 앞에 있는 연못이라 하여 연못이름을 춘당지(春塘地)라 칭하였으며 그 북쪽에는 일본식 정자를 세웠다.
그러나 이는 곧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국권이 상실되면서 개관당시 임시로 명정전등 창경궁 내의 건물을 보수하고 정비하여 미술관으로 이용하였으나 1911년 명정전의 북쪽에 일본풍의 기와를 이은 2층 건물을 신축하였다. 왜식풍의 창덕궁 박물관이 세워지고 후에 “창경궁 이왕가 박물관”5) 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박물관의 개관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도굴되어 유출되기 시작한 삼국시대의 유물과 미술품, 공예품 등과 고려자기를 비롯한 불교 공예품, 조선시대의 서화류 등을 구입하기 시작하여 이들을 수장하고 전시하기 위하여 1911년 자경전 지역에 박물관을6) 건설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궁내부 주최로 내외의 관리를 초청하여 성대한 개원식을 거행하였는데 명분인 즉 “백성들에게 실물교육을 시키고 그들의 위안장소로 쓰도록 하라.”는 순종황제의 뜻이라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창덕궁은 창경궁으로 다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1922년 궁 안에 수 천 그루의 일본을 상징하는 벚꽃을 심었고7) 1924년부터는 야간공개가 시작되고 이 뒤에도 사자, 원숭이, 낙타, 타조의 집들이 계속 건립되어 동물사 50여동, 동물 190종 700여 마리가 사육되었다.8) 이렇게 규모가 커진 창경궁은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을 갖춘 공원으로서 입장료 20전으로 시민에게 개방되었다.
이러한 치욕적인 출범과 개관의 배경에도 불구하고 국권을 상실 한 후인 1912년 이왕가 박물관의 본관 건물이 준공되어 개관하였고 유물의 수집활동도 꾸준하여 당시 소장품의 숫자가 12,230점이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우리 역사 속의 근대적인 개념의 박물관, 미술관의 역사는 광범위한 수장품을 중심으로 정부예산으로 개관한 “창덕궁 박물관”이 처음으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왕가 박물관은 이후 민족자주정신이 고양되고 일제에 저항하는 국민들이 증가하여 1926년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을 기해 6.10 만세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망국의 시대에 국민들의 정신적 구심점의 역할을 하던 이왕가 박물관을 운영경비 등 재정상의 이유를 들어 총독부박물관에 흡수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민족의 끈질긴 저항으로 인하여 무산되고 오히려 국민들에게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2) 이난영, 『박물관학 입문』, 삼화출판사, 서울, 1972, p. 57-59
3)순종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발표되었지만 실은 일제와 친일세력의 책략의 결과이다.
4)조선후기 경복궁을 북 궁궐, 경희궁을 서 궁궐이라 하였고 이를 삼 궁궐이라 하였다.
5)문영빈, 「창경궁」, 대원사, 1991, p.42-43 이후 박물관은 통상 궁내부 박물관, 창덕궁박물관, 이왕가박물관등으로 불리었다.
6)후에 장서각으로 사용되었으며 장서각 도서가 서울대로 이관됨에 따라 동식물 표본관으로 사용되다 궁궐 복원계획에 따라 1992년 철거되었다.
7)이 벚꽃은 1981년 ‘창경궁 복원계획’에 의해 현재 능동 어린이 대공원과 서울대공원의 국립현대미술관 진입로로 옮겨 심어졌다.
8)문영빈, 위의 책, p. 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