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 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순의 근원을 중심으로

정준모(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I. 시작하는 말

II. 일제 강점기의 미술관 박물관
 1. 창덕궁박물관
 2. 조선총독부박물관
  1)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2)부여분관
  3)공주분관
  4)개성부리박무관
  5)평양부립박물관
  6)이외의 미술관 박물관
 3. 이왕가 미술관, 박물관
 4. 조선총독부 미술관

III. 해방 후 미술관과 박물관
  1.국립중앙박물관
  2.덕수궁미술관
  3.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시대
  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시대
Ⅳ. 결론

* 참고문헌

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시대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몇몇 의식 있는 미술인들과 양식 있는 일반직 관장들의 이해로 국립현대미술관의 개관은 미술문화 발전에 크게 기여 한 것만은 사실이다. 1973년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한 국립현대미술관은 몇몇 전문인들에 의해 미술관으로서의 기능을 일부나마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1971년부터 확보된 작품 구입예산은 그나마 미술관 수집보존기능을 인정받았다는 의미를 가지며 한국의 근 현대 회화를 정리하기 위한 노력들이 하나둘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당대문화를 자극하고 선도하는 기능과 함께 과거의 미술품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을 통해 이를 정리하는 미술관 본래의 기능을 서서히 회복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미술관의 기구도 확대되었다. 1972년 7월 대통령령 제6288호 직제개정에 따라 8명이 20명으로 늘어난 것이며 오늘의 학예연구실과 비슷한 업무를 수행하도록 되어있는 조사연구과가 신설된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1978년 폐지될 때 까지 과장의 공석으로 실적은 전무한 상태였다는 점에서 미술관의 기능은 여전히 한계를 노정 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작품의 관리 및 게시등을 다루는 주요업무는 물론 전시의 기획 전시업무를 비전문 행정직으로 구성된 전시과에 분장되었는데 이는 단순하게 국립현대미술관의 기능을 국전 개최에 국한 시킨 결과였다.

1973년 7월, 덕수궁 석조전에 자리 잡고 있던 국립박물관이 경복궁 신축 건물(현 민속박물관)로 이전했다. 이에 따라 국립현대미술관은 덕수궁 석조전으로 자리를 옮겨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미술관 기능과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라기보다는 국전을 위한 넓은 장소의 확보라는 데 있었다는 점에서 미술관은 아직도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변함없는 전문 인력의 부재와 시스템의 미확보라는 한계로 다시 이어짐으로서 미술관 발전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미술관의 작품의 수집과 보존 관리 그리고 조사연구라는 본연의 자세는 차치하고라도 미술계는 미술문화의 본향이자 일반감상자와 작가를 매개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 전시 기능마저도 제대로 운영될 수있는 시스템 구축과 관련한 일단의 요구조차도 없었으며 따라서 어찌 보면 이러한 상황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석조전으로 옮겨온 국립현대미술관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와 원로작가 집단 및 개인전 그리고 몇몇 소규모의 전시를 개최하는 단순한 전시공간으로 운영되어 나갔다. 또 작품 구입과 기증을 통해 소장품을 확보함으로서 옹색하지만 미술관의 모습을 조금씩, 조금씩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이중에서도 눈에 뜨이는 전시로는 덕수궁석조전이전 첫 전람회인 <한국현역화가 100인 전>은 당시 현역 한국화가, 유화가등을 모은 당시의 미술상황을 가늠해보는 의미 있는 전시였다. 1975년 12월에는 김환기 회고전이, 1978년 11월에는 <한국현대미술20년의 동향전>은 전후 한국 현대미술의 주요 흐름을 보여주는 특별기획전으로 미술사적 관점을 취한 최초의 전시였다.

또한 1979년 9월에는 <한국현대미술-1950년대 서양화전>과 1980년 6월에 <한국현대미술-1950년대 동양화전>등이 열려 특정한 시대미술의 성격과 특징을 담아내고자 하였다.

이러한 의미있는 전시를 국립현대미술관이 새로운 모습을 보이자 미술계는 다시 미술관의 전문성을 요구하기에 이르렀고 이에 1980년 비정규직으로 책임도 권한도 없는 전문위원제도를 두어 자문역을 맡김으로서 미술관의 전문성을 담보해 내고자 하였다. 당시 전문위원으로는 오광수와 김지현이 그후 윤우학이 그리고 과천이전 후에도 개관준비와 올림픽을 앞두고 편법적으로 전문위원제도를 운용하여 서성록과 황인기등이 재직한 바 있다.

이들은 자문역에 불과한 자신들의 입장을 무시하고 열정적으로 미술관 일에 매달렸으며 이들의 노력의 결과는 한국미술계의 토양을 비옥하게 하였을 뿐 만 아니라 국전개최기관으로이라는 한계를 벗고 국립현대미술관이 한국미술의 중심이란 나름의 성격을 구축 해 나갈 수 있는 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