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덕수궁미술관
해방과 함께 맞이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이 왕가 미술관과 총독부 박물관을 미군정이 인수, 이 왕가 미술관 즉 다름 아닌 황실미술관은 1946년 개관과 함께 “덕수궁미술관”35)으로, 총독부 박물관은 “국립박물관”으로 새롭게 출범하였다.
해방 후 덕수궁미술관은 첫 행사로 한국의 미술인들이 결성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조국의 해방을 기념하고자 마련한 <해방기념 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가 1945년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다. 97명의 작가가 동양화 23점, 조각과 공예 55점을 비롯 모두 132점을 출품했는데 일제당시 친일한 작가들은 예외로 하였다.36)
미 군정청은 이왕가미술관을 이규필(李揆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는데 이규필은 이왕가미술관과 일생을 같이한 사람으로 일제기에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직원으로 봉직하였고 고려자기와 조선자기에 남다른 식견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37). 그는 이왕가미술관을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하고 관장에 취임하였는데 당시 소장품은 이미 1만점38)에 달했으며 석조전의 수장고는 일본의 미술품을 보관하기 위해 매우 견고한 수장고와 진열장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덕수궁 석조전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기로 미 군정청이 결정하고 나서 이 중요한 미술관 시설들은 미 공병들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이후 정부가 수립되고 나서도 황실재산의 처분등과 관련하여 미술관 운영예산을 제대로 보조받지 못하였고 한때는 입장료를 징수하여 운영에 보태거나 지하 강당을 결혼식장으로 임대해 주어 미술관 운영경비를 마련하기도 하였다.39)
민족의 귀중한 유물이 산적인 덕수궁미술관의 입장에서는 실로 통탄 할 노릇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조선공예가협회 주최 회원전>, <제1회 전국 한묵전>, <이충무공 탄생 기념전>을 계속해서 개최하였다.40)
그러나 치안이 허술한 과도기를 틈타 전국 각지에서 국보의 도난사건이 빈발함에 따라 덕수궁미술관은 전시를 고미술품의 전시는 중지하였지만 소장가나 작가들의 작품을 출품 받아 여는 전시는 계속하였다. 6.25동란이 터진 후에도 경제적인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이에 당시 국립 박물관장이던 김재원의 도움으로 박물관 직원으로 등록하여 연명 할 수 있었다.41)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립박물관은 비상시 유물의 안전을 위하여 7월 말부터 포장에 들어가 8월에는 수장고가 튼튼했던 덕수궁미술관 신관 수장고로 소장 유물들을 이전하였고 이를 관리하기 위해 국립박물관의 황수영이 파견되었다. 이후 9.28 수복을 맞았고 다시 1.4 후퇴와 함께 덕수궁미술관은 국립박물관과 더불어 부산으로 소장 자료와 함께 이전했다.42) 이때부터 덕수궁미술관은 수장고를 내어 주어 유물을 보관해 준 결과가 결국은 국립박물관에 더부살이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환도와 함께 서울로 옮겨왔으나 포격으로 인해 덕수궁 석조전이 화재로 폐허가 되어있었고 따라서 국립박물관에 얹혀 다녀야 했다. 국립박물관도 이승만 대통령지시로 경복궁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과거 국립민족박물관 건물이었던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들어갔다.
이후 1954년 11월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의 대통령께 직소에 따라 복구한 덕수궁미술관인 석조전으로 이전하였고 이 때 덕수궁미술관도 신관 즉 서관으로 복귀하였다. 그러자 여기서 덕수궁 내에는 서양미술품과 일본의 미술품만을 제외한다면 별반 다를 것 없는 소장품을 가진 기관이 이름만 미술관과 박물관으로 나뉘어 공존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43)
여기서 두 기관간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애초에 이왕가미술관은 조사연구기관이 없었고 총독부박물관은 처음부터 지방의 고적조사와 발굴을 토대로 마련된 까닭에 조사연구기관이 있었다는 것으로 이것이 해방 후에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과의 근본적인 차이이자 덕수궁미술관의 최대한의 약점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으로 말미암아 덕수궁미술관은 소장품의 질이나 양이 국립박물관에 비해 월등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1969년 5월 국립박물관에 흡수되고 마는 것이다.44)
당시 덕수궁미술관은 문화재관리국소속으로 하갑청(河甲?)관장(직급 2급에 해당)이 특별회계의 적용을 받는다는 장점을 이용 종합박물관을 추진하였고 이에 국립박물관장 김재원은 국립박물관까지 병합하려든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45)
물론 여기서 국립박물관은 이왕가 미술관이 재정사정등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직분을 충실하게 하지 못하는 동안 어느 정도 미술부장 최순우 등을 중심으로 하여 미술관의 역할을 충실히 해 오기도 하였다.
35) 최순우,「해방 이십년-미술」, 『대한일보』1965년 5월 27일-6월 8일자
36) 민주주의 민족전선, 「예술, 미술」,『조선해방연보』문우인서관, 서울, 1946년 10월
37) 김재원, 『경복궁 야화』, 1991, 탐구당, 서울, P.39-40
38) 당시 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도자기 3,462점, 금은동 제품 2,623점, 목죽제품 269점, 철제품 550점, 고서화 4,292점등 총 10,935점이었다고 한다. 윤우경, 『만성록』서울프레스, 서울, 1992
39) 김재원, 같은 책, p.40
40) 동아일보, 1948년 11월 5일자.
41) 김재원, 앞의 책, p.40
42) 황수영, 「불적일화 14-국립중앙박물관 생활과 한국전쟁」,『불교신문』2002년 5월 2일자
43) 김재원, 같은 책, p.92
44) 김재원, 같은 책, 같은 페이지
45) 김재원, 같은 책,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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