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조선총독부박물관
조선 총독부는 “조선 총독부 박물관”을 1915년에 개관하기에 이른다. 총독부는 1915년 시정(施政) 5년을 선전하려는 의도로 일종의 산업박람회 격인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다. 1913년 8월 6일 총독부 고시에 의해 회기를 1915년 9월 11일부터 1915년 10월 31일까지로 정하고 공진회 규칙을 발포하여 출품의 종류, 범위, 방법, 심사, 포상 및 입장과 관람에 관한 규정을 정했다.9)
이후 개최된 물산 공진회는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식민지 지배를 통해 한국이 많은 발전을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이전과 이후를 비교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이를 위해 천왕의 친족인 강인노미야 코토히토(閑院宮 裁仁)가 참석하였다는 사실이다.
이후 당시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축한 유일한 내화건물을 본관으로 하여 박물관을 개관하였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다. 이 건물은 백악의 서양식 지하 1층, 지상 2층의 석조 건물로 정면에 석조기둥을 세웠고 내부에는 중앙의 큰 홀을 중심으로 좌우 2실씩 모두 5실로 나뉘어 있었으며 바로 이곳에 고미술품을 전시했다.10)
총독부박물관이 간행한 박물관안내(1931년)에 의하면 그 설립목적은‘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고적조사에 의해 수집되고 정리된 확실한 자료를 진열하여 반도 2000년의 문화를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 곳에는 한국문화의 근원을 분명히 하고 그 발전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삼국시대고분출토품”실과 “낙랑태방군시대유물”실의 전시실을 두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실은 먼저 일본인과 한국인이 동족임을 분명히 밝히고 두 번째로 고대로부터 시대가 흐름에 따라 한국이 피폐해지고 나약해져 일제의 병합에 의해 한국인이 행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서 일본의 강점을 합리화하기 위한 술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적조사사업은 조선사편찬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던 역사의 기원에 관한 고고학상의 근거를 제시할 목적으로 일본의 조선지배의 정당화에 중요한 목적을 두었고 경복궁에 개관한 총독부박물관은 이렇게 한국지배에 관한 성과를 과시 하고 확인시켜주는 장으로 기능을 충실하게 해 나갔다.
즉 일제가 한반도를 강점한 후 세끼노 사다무(關野 貞)등 관변 학자들에 의해 실시된 고분발굴과 고적조사에 의한 수집품과 매장 유물의 국고귀속품, 구입품 그리고 각 사찰의 기탁품등이 주축이 되어 역사, 미술, 공예에 관한 자료를 수집 전시하였다.
일제에 의한 총독부 박물관의 개관은 근대적인 유물관리나 연구, 전시기법의 도입이라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지만 이 이면에는 일제의 문화적 책략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일제가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기 위해 관변 학자들을 동원하여 일본의 역사를 미화하고 한국역사의 정체성을 유명무실화 시키는 동시에 한국에 대한 일본에의 종속성을 강화시키고자하는 의도가 있었다.
이러한 의도는 문화적 동질성과 공유를 통한 일본과 한국과의 같은 뿌리, 같은 민족으로서의 문화적 공감대를 강화하고자 했던 임라일본부설(林羅日本府設)과 한(漢)나라의 낙랑 지배설 등을 입증하기 위해 우리 고대 유물발굴에 열중하였다.
또한 우리 고대 유물발굴에 치중했던 또 하나의 목적은 한국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었으며 고적조사발굴사업을 통해 이룩하고자 했던 것은 허구적 내선 일체사상의 합리화였고 그리고 그 결과물은 다름 아닌 바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이었다.
이 건물은 이 물산공진회를 위해 건립된 탓에 매우 협소하고 전시실의 구조나 조명과 관람동선등이 전혀 맞지 않았다. 따라서 본 건물 뿐 만 아니라 방화 및 방호시설이 전무한 경복궁의 전각인 근정전(勤政殿) 수정전(修政殿) 사정전(思政殿) 등을 사용하는 일시적인 미봉책을 써서 개관하면서부터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었다. 또 인건비 관계로 근정전과 사정전은 폐쇄한 채 필요할 때에만 특별히 열어서 공개하는 상태에 까지 이르기도 하였다.
1030년대 들어서면서 박물관을 식민지 사회교화에 활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박물관 주간을 마련하여 관람료를 5전에서 2전으로 할인하고 강연회, 영화회등을 개최하여 일본의 지배 담론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자 하였을 뿐만 아니라11)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농업, 광업, 경찰분야에 걸친 “종합박물관 계획”이 그것이다.
1936년부터 3개년 계획을 세워 왜성대 근처의 총독관저의 근처에 콘크리트 3층 건물을 건립하기로 하고 설게공모를 마치고 지진제(地鎭祭)를 갖기도 하였다. 또한 1937년에는 정무총감을 위원장으로 9인의 고문을 두고 최남선등 8인을 건설위원으로 위촉하여 ‘박물관 건설위원회’를 설치하여 기존의 조선 총독부박물관의 개축등이 포함된 본격적인 종합박물관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이 계획은 전쟁이 심화되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12)
그러나 당시의 박물관의 건물과 수장고는 도난이나 방화 등으로부터 거의 무방비 상태 였을 뿐 만 아니라 경복궁 회랑도 수장고 대신 사용하여 꿀 상자에 담긴 발굴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아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또 대형 수장고 건립을 위한 박물관의 요청도 총독부는 무시하였을 뿐 만 아니라 1940년대 들어서는 박물관을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사무실로 전용할 계획을 내 놓기도 하였다.13)
이후 전쟁이 침략전쟁이 격화되면서 이 계획이 실행에 옮겨 질 조짐을 보이자 1941년 당시 총독부 박물관 주임이던 아리미츠 쿄이치(有光敎一)등 박물관 직원들은 경주 및 부여분관으로 유물을 소개하고 서울의 본관을 페쇄하여 문화재를 전화나 약탈로부터 지키고자 하였다. 이후 해방되고 총독부 박물관이 잇던 이 건물은 전통 공예관으로 학술원 예술원으로 사용되다 경복궁 관리사무소를 거쳐 1994년 철거되고 말았다.
이러한 일제의 시도와는 달리 일제강점기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민족적인 자긍심을 가지고 자신의 고적과 유물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이에 따라 민간의 노력에 의해 자신의 지역에서 발굴, 출토된 문화재를 보존하고자 지방에 박물관들이 개관하였고 이는 후에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분관 형태로 귀속되었다.14)
1.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
1910년 경주 시민들에 의해 출범한 경주 신라회는 1913년 경주 고적 보존회로 정식 발족하고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을 이용하여 전시관을 개장하고 신라시대의 출토유물들을 전시하는 지역의 고 유물 전문 박물관 기능을 수행하는 시설을 마련하였다. 이후 1921년 가을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어 그 고분을 금관총이라고 칭하였다. 이때부터 금제 유물들을 비롯한 신라시대의 유물에 대한 관심은 집중되었고 이에 금관총 발굴과 조사를 계기로 하여 경주 시민들은 금관고를 지어 보존과 전시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여 금관등 유물의 외지로의 반출을 막았다. 하지만 이후 1926년 총독부 박물관의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2. 부여분관
또한 부여에서도 1929년 9월 27일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扶餘古蹟保存會, 일명 고적보승회)를 설립하여 백제 문화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부여의 여러 유적과 유물을 보존하려고 힘썼다. 그 뒤 이 단체를 중심으로 하여 백제의 유물을 중심으로 문화재를 하나 둘씩 모아 부소산 남쪽에 자리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인 관아의 객사인 백제관에 전시를 시작하면서 부여의 유물을 공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1939년 4월 1일자로 '조선총독부 박물관 부여분관'이라 하여 비로소 '부여박물관'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1945년 해방이 되자 '국립박물관 부여분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3. 공주분관
일제 강점기 공주분관은 1935년 공주사람들이 이 지역의 백제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公州古蹟保存會)를 모태로 출범하였다. 1927년 일본인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에 의해 공주의 송산리 고분이 발굴되면서 1933년 궁주사적 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가 발족하였고 이에 박물관 건립요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후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된 이후 전 도지지사 관저부지에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건의가 있었고 이후 총독부의 지원과 민간에서 모금한 기부금을 토대로 선화당(宣化堂)을 복원 건립하여 박물관으로 출범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 박물관 분관으로 편입되었다. 해방 후 이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公州分館)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다.
4. 개성부립박물관
진홍섭에 의하면 1931년 11월1일 개성부립박물관이 개관하기 전, 일부 사람들의 발기로 만월대 앞에 고려시대 유물을 수집해 전시하는 진열관이 있었는데 오래 지 않아 문을 닫았다고 한다.15) 개성부립박물관은 1930년 읍에서 부(府)로 승격하면서 이를 기념하여 일부 기업과 은행 그리고 지역유지들의 발의하여 대화정의 부청부근에 부지를 정하였다. 이후 건평 87평에 전면 9칸, 측면 4칸, 정면 중앙3칸에 출입구를 내고 채광창을 갖춘 분홍색 인조석으로 마감한 내화성 콘크리트 건물이었다.17) 이곳에는 주로 낙랑과 고구려 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의 유물을 전시하였고 이후 고유섭이 관장직에 부임하여 박물관의 기초를 닦는 동시에 한국미술사 연구에 매진하면서 개성부립박물관의 성가를 높이기도 하였다. 일제 강점기 지방유지들의 총독부박물관의 분관요구에도 불구하고 부립으로 정체를 유지하다 1946년 4월 해방이 되고나서 국립박물관의 개성분관으로 개편되었다.
5. 평양부립박물관
평양지역의 고적에 대한 일제의 조사 및 발굴은 강점 이전부터 세키노 타다시(關野 貞)등일본인 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 조사의 배후에는 동경대학의 건립주체인 일본의 국가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양 지역에서 낙랑문화의 영향을 찾아 일제 강점의 논리를 역사속에서 찾아내고자 하였다. 이런 발굴조사와 유물의 출토로 인해 1925년경부터 평양에 독립적인 박물관을 건립하자는 제안이 있었고, 1927년 2월 건축비로 당시 3만여 원으로 추정하고 당시 대동동지회(大同同志會)의 사무소를 헐고 그 자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박물관을 건립하지는 안이 나왔다.18) 이후 1928년 8월에 3층의 부립(府立) 도서관이 건립되자 그 건물 3층을 전시실 용도로 사용하게 됨에 따라서 좁지만 유물을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이렇게 도서관 3층에 자리하고 있던 차에 1931년 말 박물관 건립요구가 세를 더하면서 ‘낙랑박물관 (일명, ‘모란대 박물관’)‘의 건립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1931년 11월 14일 철도 호텔에서 후지하라(藤原) 지사, 아베(阿部) 부윤 이하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박물관의 건립문제를 토의하여 박물관 건립비로 6만 여원의 소요예산 마련을 위해 도(道)와 부(府)가 각각 5천원씩, 보존회와 평양에서 2만원, 나머지 3만원은 기부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19)
이렇게 충당된 기금을 바탕으로 1933년 9월 8일에 평양의 번화가 아사히 쵸(旭町)의 평양부청(平壤府廳) 앞에 박물관이 건립되고 10월 17일에 정식 개관된 평양부립박물관20)은 여타지방 박물관들과 달리 번화가에 건립된 것도 한 특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관장에는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촉탁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취임하였다.21)
6. 이외의 미술관, 박물관
일제의 식민지 정책과 민족말살정책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자각과 자긍심의 더욱 증대되어 민족의 문화유산의 발굴과 보존에 관한 관심은 날로 고조되어갔다. 특히 이 시절 간송 전형필의 역할은 한국 박물관, 미술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1930년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간송은 귀국 후 오세창과 김용진 고희동과 교우하면서 일찍부터 민족문화에 관심을 갖고 민족의 문화적 자산의 수집을 시작하였다. 이들 박물관은 고고 자료와 고분출토품을 중심으로 한 역사, 고고, 민속자료가 주를 이루는 역사 박물관적 성격이 강하였다.
서화, 고서수집에서 시작하여 도자기, 불상 등 불교미술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방대한 유물을 수집하여 성북동 선잠단 부근에 1938년 사립미술관인 보화각(保華閣)-현재 간송미술관-을 설립하였다.22) 오늘날의 간송미술관 전신인 보화각은 질과 양에서 한국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민족문화의 보고인 동시에 일제의 침탈로부터 우리 민족문화유산을 지켜 낸 장소이기도 하다.
한편 한국의 민예미에 심취하였던 야나기 무네요시(柳 宗悅)와 아사카와 다구미(淺川 巧)등이 중심이 되어 1924년 건립된 조선민족미술관은 박물관 역사에 있어서 매우 독특한 사례가 되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국의 민속공예품에 관심을 집중하여 연구하고 이를 수집하여 경복궁 집경당에 박물관을 개관하였다.23)
이와 함께 일제는 총독부 박물관외에 왜성대(倭城臺) 즉 현재의 교통방송, 전 중앙정보부 남산분관부지에 역대 통감이나 총독들의 유품을 전시하였고 일본의 황제가 한국에 왔을 때 탔던 마차, 한일합방조약 당시의 가구가 놓은 조인실 등등을 전시한 시정기념관(施政紀念館)을 남산에 두었다.
9) 허영섭, 『조선총독부, 그 청사 건립의 이야기』,한울, 서울, 1996, p.61
10) 최석영, 「한국근대의 박람회, 박물관」, 서경문화사, 서울, 2001, p.93
11) 앞의 책, p.106-107
12) 전경수, 「한국박물관의 식민주의적 경험과 민족주의적 실천 및 세계주의적 전망」, 한국문화인류학회편,『한국인류학의 회고와 전망』1998, 집문당, 서울, p.678-680
13) 최석영, 앞의 책, p.95
14) 이러한 민간활동의 배경에는 일본과 친일파들의 재정적 지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순수민간 활동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는 견해도 있다.
15) 동아일보, 1933년 11월 4일
16) 진홍섭, 「개성박물관의 회고」, 우만형 편,『개성』1970, 예술춘추사, 서울, p.167
17) 위의 책, 같은 페이지
18) 조선일보, 1927년 2월 17일자
19) 조선일보, 1931년 11월 17일 및 1932년 4월 19일자
20) 동아일보, 1933년 9월 11일 및 동년 10월 9일자
21) 그는 1941년 평남 중원군 동두면 진파리에서 고구려 벽화를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매일신보, 1941년 6월27일자
22) 최열, 「한국근대미술의 역사」,1998, 열화당, 서울, P.400
23)앞의 책,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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