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미술관사 연구- 국립미술관에 대한 인식과 제도적 모순의 근원을 중심으로

정준모(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

 I. 시작하는 말

II. 일제 강점기의 미술관 박물관
 1. 창덕궁박물관
 2. 조선총독부박물관
  1)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2)부여분관
  3)공주분관
  4)개성부리박무관
  5)평양부립박물관
  6)이외의 미술관 박물관
 3. 이왕가 미술관, 박물관
 4. 조선총독부 미술관

III. 해방 후 미술관과 박물관
  1.국립중앙박물관
  2.덕수궁미술관
  3.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시대
  4.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시대
Ⅳ. 결론

* 참고문헌

3. 국립현대미술관 경복궁 시대

1960년대 이르러 4.19혁명으로 민족적 자각과 고양된 민주의식은 우리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어렵게 싹튼 민주주의를 짓밟고 등장한 5.16 군사 쿠테타 세력은 국민의 관심을 민족의 정통성과 주체성의 방향으로 유도하였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선포하고 현충사를 성역화 하는 등 문화정책을 자신들의 혁명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46)

이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민족문화센터’가 구상되고 1965년 ‘종합박물관건축계획안’이 수립되고 다음해 경복궁에서 기공식을 갖기에 이르며 이와 함께 해방 후 국립박물관에 흡수된 ‘조선민족박물관’ 성격의 ‘민속박물관’이 문을 열기도 하였다. 이후 1968년 문화공보부가 신설되면서 그전까지 문교부가 주관하던 박물관 관련업무와 국전개최업무를 이어받게 되었다.

애초의 ‘종합박물관 건축계획안’은 고대유물부터 근 현대미술까지를 포함하고 있어 박물관의 일개 파트로 미술관이 기능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에 당시 미술계가 이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오자 ‘미술부문’만을 다루는 ‘국립미술박물관’ 설립이 여론화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직제가 마련되고 이에 의해 국립현대미술관이 1969년 경복궁에 개관하기에 이른다.47)

물론 이 이전부터 미술계의 중요인사들은 이전부터 국립미술관 설치를 요구하고 있었다. 김환기는 일찍이 1950년 현대미술관 설립을 촉구했고, 48)이경성은 1955년 국립근대미술관 설치를 요구했다.49) 또 김영기는 1956년 현대미술관 설립을 건의하고 있다. 1957년 서양화가 김인승은 동아일보에 미술계가 덕수궁미술관을 접수하여 현대미술관을 개관 할 것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근대사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미술문화의 연구개발, 작품수집, 보존, 사회교육, 국제전 개최 같은 국제미술교류 등을 담당시킬 목적과는 관계없이 창설되었다. 50)

1968년 김신조등 무장공비 서울침입, 울진 무장공비 침투사건, 통혁당 사건등등으로 인해 주민등록제도가 시행되고 예비군이 창설되는 등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어수선 했던 이 시기에 문교부는 그간 자신이 관장해 오던 박물관 업무를 신설된 문화공보부로 이관시켰는데 이 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도 개최권도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다.

이에 문화공보부는 이에 따라 1968년 제17회 전람회를 주최해야만 했다. 종래의 방식대로 예술원 회원으로부터 국전의 심사위원 후보를 추천받은 문공부는 그동안 말 많고 탈 많은 국전의 개선을 목적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을 설립하고 여기서 국전의 운영과 심사등 제반 사항을 관장함으로서 문화공보부는 국전을 둘러싼 잡음으로부터 어느 정도 부담을 덜고자 하였다.

따라서 이듬해인 1969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설립을 결정하고 8월 23일자 대통령령 제4030호 국립현대미술관 직제를 공포했다. 곧바로 그 해 가을 개최할 제18회 전람회를 위해 심사위원을 추천하기 위한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국무회의는 운영자문위원회 규정을 통과시켰고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10월 20일 총독부미술관 건물이었던 경복궁 별관에서 개관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광복 후 새롭게 출범하면서 일제가 시정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미술관에 자리 잡았다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록 이름은 현대미술관이라 칭하였지만 일제의 잔재가 그대로 남은 곳에 오직 국전을 위해 개관 했다는 사실도 실은 당시 문공부의 국전을 둘러싼 잡음으로부터 책임을 면해 보려는 보신책의 일환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최초의 미술관운영자문위원회 위원의 면면을 보아도 안배와 배려가 주를 이루는 미술관 운영의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인선이었다. 또한 설치령에 보면 ‘현대미술작품의 구입, 보존, 전시 및 국제교류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곳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관장부터 사무장, 서무담당, 운영담당 모두 행정관료 일색으로 보임함으로써 전문성과 거리가 먼 것은 물론 일개 행정관서로서의 역할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미술관의 개관과 설립배경은 사실은 오늘까지도 국립현대미술관을 구조적으로는 기형적으로, 내용적으로는 전문성이 결여된, 전시관의 기능에 머물게 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고 있다.

그리고 관장에 임명된 일반 행정직 관장은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규정에도 없는 자문위원을 두어 전문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편법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특히 1971년 11월 취임한 제3대 장상규(張商奎)관장은 노수현, 이마동, 김인승, 박득순과 같은 작가와 최순우, 이경성, 이구열, 유근준과 같은 사학자 및 평론가에게 자문을 구하면서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구입예산 300만원을 확보하여 13점의 회화작품 구입하였고 박수근의 작품기증을 비롯 유족 및 작가의 기증을 통해 모두 회화 72점, 조소 29점을 처음으로 소장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46) 탁석산, 『한국의 정체성』,책세상, 서울, 2000, p.
47) 이경성, 「어느 미술관장의 회상」,1998, 시공사, 서울, P.204-206
48) 김환기, 「현대미술관 설립에 대하여」『신천지』1950년 3월호
49) 이경성, 조선일보 1955년 8월 7일자.
50)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을 개관했다는 기사는 어느 신문에서도 다루지 않고 있다. 단지 한국일보(1969년 10월 21자) 사회면에 제 18회 국전 개막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후 작품감상을 했다는 기사와 함께 이번 국전 개막식은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식을 겸한다 라고 보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