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본 문
1.덕수궁과 미술관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공사관을 떠나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경운궁은 덕수궁의 본시 이름이다. 이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특히 고종황제가 경복궁에 봉안하던 역대 선왕들의 진영(眞影)을 경운궁으로 옮겼던 일은 황실의 중심을 잡고자 하는 뜻이었겠지만 이때부터 초상화를 봉안하는 장소 구실을 경운궁이 담당했다는 점에서 미술품과의 인연을 떠올릴만한 일이라 하겠다.
덕수궁 석조전은 1898년 일본인들이 설계하여 주도한 끝에 1907년에 준공했다.3) 그러나 이 때까지 덕수궁은 미술관과 별다른 인연이 없었다.
그 뒤 일제는 순종황제를 창덕궁으로 보내면서 1907년 창덕궁 궁궐 안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흔히 연구자들은 이것을 최초의 박물관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짐작컨대 박물관은 그 이전에 어떤 형태로든 간에 존재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황실박물관은 뚜렷한 연구가 없어 그 발자취를 헤아릴 수 없으나 황실 도서관인 규장각이나 선왕의 진영을 모시는 건물 및 선물이나 골동, 서화를 모아 진열해 두는 건물 따위에 관한 연구를 통해 조선황실 박물관의 역사를 서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1908년 창덕궁 명정전(明政殿)에서 출범한 황실박물관은 진열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어느덧 1909년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주무관리는 물론 일본인이었다. 그러다가 1910년 황실령 34호를 발표하여 이왕직 예식과로 하여금 미술관 사무를 관장토록 하고 창경원으로 이름을 바꾼 창덕궁 안에 새 건물을 짓고 이왕가 박물관이라는 모멸스런 이름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총독부는 1915년 경복궁 안을 폐허로 만들고 공진회 박람회장으로 사용했는데 이때 지은 건물 가운데 하나를 총독부박물관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두 개의 박물관 시대가 열린 것이다.
1933년 5월 황실과 총독부는 덕수궁 석조전을 상설미술관으로 결정하고 일본인들로 조직한 자문단으로 하여금 황실박물관 소장품 선정 및 일본미술가 작품 수집을 꾀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최초의 계획을 뒤엎고 덕수궁 석조전 상설미술관을 일본미술품으로 채우기로 결정하여 ‘일본 미술계 최고의 걸작품을 망라한’ 전람회를 20일 주기로 교체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4)
조선미술품 전람회는 1934년에 이르러 봄과 가을 두 차례만 열었으니5) 덕수궁 미술관은 일본미술의 전당으로 출범했던 것이다.6)
덕수궁 석조전이 일본미술 전시장으로 일관함에 따라 황실은 조선미술품 전시를 위한 건물을 석조전 옆에 짓기로 하고 1936년에 신관인 서관 공사를 시작했는데 물론 일본인이 설계한 것이다.7)
그 사이 《일본10대가 작품전》을 여는 등 일본미술 전람회를 계속해 왔는데 비로소 1938년 3월 25일 창덕궁 황실미술관을 폐관하고 신관 완공을 계기로 이전을 시작해 5월에 완료했다.
석조전 구관인 동관은 기존 관행대로 일본미술품 전람회를, 신관인 서관은 조선미술품 전람회를 여는 장소로 결정했는데 구관은 덕수궁미술관, 신관은 이왕가박물관으로 정했으며 덕수궁 신구관 모두를 통틀어 이왕가미술관이라 일렀다.
8)
한편 1942년에 이르러 전국에 몇 개의 부립(府立) 박물관이 개관해 있었는데 개성박물관, 평양박물관, 부여박물관, 경주박물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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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석조전 준공기」, 『매일신보』, 1910.12.3.
4) 「석조전의 새 화폭」, 『동아일보』, 1933.11.27.
5) 「창덕궁 비장 명화 10월부터 공개 진열」, 『조선일보』, 1934.9.15.
6) 최열, 「1934년의 미술」,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열화당, 1998.
7) 「이왕가미술관」, 『동아일보』, 1936.4.15.
8) 본지 특파기자, 「이전된 이왕가박물관」, 『조광』, 19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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