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미술관 역사와 국립근대미술관 구상

최열(미술평론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원)

 I. 머리말

II. 본 문
  1.덕수궁과 미술관
  2.덕수궁미술관 시대
  3.국립현대미술관의 출범과 정체성
  4.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 석조전
  5.직제의 비전문성
  6.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의 기형성
  7.덕수궁 분관 개관
  8.덕수궁미술관 직제개정의 의미와 현황
  9.국립근대미술관을 향하여

III. 맺음말

* 도 판

II. 본 문

3.국립현대미술관의 출범과 정체성

국립현대미술관 개관은 미술인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오던 숙원사업의 하나였다.

김환기는 일찍이 1950년 현대미술관 설립을 촉구했었고31) 이경성은 1955년 국립근대미술관 설치를 촉구했었다. 이경성은 “우리 사회의 후진성 때문에 미술발전은 일시 저해되고 한국미술계는 국제적 영역 외의 고도에서 망향과 향수에 잠기고 있다”면서 다음처럼 주장했다.

“ 국립박물관이 고문화재의 보존 정리 연구 교육을 담당하고 국립도서관이 고전적 서적의 관리 보관 열람을 담당함과 같이 국립근대미술관은 한국 근대사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미술문화의 연구개발, 작품수집, 보존, 사회교육, 국제전 개최 같은 국제미술교류 등을 담당시키는 것이다.”32)

또 김영기는 1956년 현대미술관 설립을 촉구했는데33) 최근 반도호텔과 동화백화점의 일부에는 비공식적이나마 현대작가들의 작품을 진열하여 내외일반에 공개하고 있으니 전쟁이후 수십 개국의 외국인들이 방문하고 있고 따라서 ‘국제적 세계성’을 가지고 세계 일류의 도시 대열에 서기 시작한 서울에 민족문화의 바로미터인 현대미술관 시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그 같은 논리와 관계없이 창설되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문교부는 자신이 관장해 오던 박물관 업무를 1968년 신설된 문화공보부로 이관시켰는데 이 때 대한민국미술전람회도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다. 문화공보부는 이에 따라 1968년 제17회 전람회를 주최했다.

이어 문화공보부는 1969년에 국립현대미술관 설립을 결정하고 8월 23일자 대통령령 제4030호 국립현대미술관 직제를 공포했다. 곧바로 그 해 가을 개최할 제18회 전람회를 위해 심사위원을 추천시키기 위한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국무회의는 운영자문위원회 규정을 통과시켰고 이어 국립현대미술관은 1969년 10월 20일 총독부미술관 건물이었던 경복궁 별관에서 개관했다.

총독부미술관 건물은 총독부가 1937년 시정 25주년을 기념해 기존의 총독부박물관 뒤편에 미술관을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예산을 세워 ‘조선 정조가 농후한 미술관’을 착공34)하여 1939년 봄에 완공했다. 개관 첫 전람회는 총독부가 주관한 제1회 《서도전람회》였는데 중국과 조선 옛 대가들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35) 그러나 이 미술관의 건립 목적은 조선미전의 색채를 더하기 위한 것이었다. 총독부미술관은 이후 매년 《조선미술전람회》를 개최하였고 또한 총독부가 후원하는 여러 전람회를 유치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출범하면서 바로 그 같은 건물에 자리잡았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총독부가 한반도 식민지 시정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미술관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은 일제부역미술 청산을 하지 못한 조건에서 한국미술의 내면에 식민성을 짙게 깔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성찰 없는 관료들의 무지와 식민성이 빚은 결과라고 하더라도 변명할 수 없다.

건물에 짙게 물들어 있는 상징성을 고스란히 안고서 출범한 사실과 더불어 개관 직전에 구성한 최초의 미술관운영자문위원회 위원은 김은호, 이상범, 장우성, 도상봉, 박고석, 김영주, 이준, 박서보, 김경승, 김세중, 이순석, 손재형, 배기영, 이동모였는데 이 명단이 보여주는 원로와 신진의 혼합, 화단 영향력 따위를 고려해 볼 때 미술관 운영의 전문성 따위와 무관한 것으로 오직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을 위한 인선이었다.

이인범은 “국전의 운영을 위해 정부가 국립현대미술관을 설립한 것은 아니었다해도 미술관의 기능 중 현실적으로 가장 우선하는 것이 국전의 운영, 전시였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 하다”고 하면서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의 일련의 발전방향과 그 성격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36)

대한민국미술전람회 개최를 위한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사실은 대통령의 국립현대미술관 직제령에서 그대로 드러나 있다. 제1조 설치 항목은 ‘현대미술작품의 구입, 보존, 전시 및 국제교류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는 곳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관장부터 사무장, 서무담당, 운영담당 모두 행정관료 일색으로 명시했던 것이다.

행정주사급인 서무담당이 작품 구입, 보관, 관리 업무를, 행정주사급인 운영담당이 전시, 국제교류 그리고 심지어 ‘현대미술의 연구, 발전에 관한 사항’업무를 담당케 한다는 업무분장 규정37) 은 당시 미술관 전문직의 부재가 가져다 준 결과이기도 했지만 향후 국립현대미술관의 관료적 성격을 강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공무원 관장은 규정에도 없는 관장 개인의 자문위원을 두는 일도 일어났다. 1971년 11월 제3대 장상규(張商奎)관장은 노수현, 이마동, 김인승, 박득순과 같은 작가와 최순우, 이경성, 이구열, 유근준과 같은 사학자 및 평론가에게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13점의 회화 구입과 박수근의 작품기증을 비롯한 유족 및 작가의 기증을 통해 모두 회화 72점, 조소 29점을 처음으로 소장하였다.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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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김환기, 「현대미술관 설립에 대하여」, 『신천지』, 1950.3.
32) 이경성, 「국립근대미술관 설치」, 『조선일보』, 1955.8.7.
33) 김영기, 「현대미술관의 필요성-윤상수집 현대화전을 보고」, 『서울신문』, 1956.7.26.
34) 「호화의 예술 전당」, 『동아일보』, 1937.11.1.
35) 김용준, 「한묵여담」, 『문장』, 1939.11.
36) 이인범, 「국립현대미술관의 형성」, 『현대미술연구』, 제2집, 국립현대미술관, 1990.
37) 「국립현대미술관 직제(대통령령 제4030호)」, 1969.8.23.
38) 이인범, 앞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