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의 미술관 역사와 국립근대미술관 구상

최열(미술평론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원)

 I. 머리말

II. 본 문
  1.덕수궁과 미술관
  2.덕수궁미술관 시대
  3.국립현대미술관의 출범과 정체성
  4.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 석조전
  5.직제의 비전문성
  6.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의 기형성
  7.덕수궁 분관 개관
  8.덕수궁미술관 직제개정의 의미와 현황
  9.국립근대미술관을 향하여

III. 맺음말

* 도 판

II. 본 문

2.덕수궁미술관 시대

해방이 되자 덕수궁 이왕가미술관 다시 말해 황실미술관은 미군정의 관리 아래 들어갔다. 조선프롤레타리아미술동맹이 1945년 9월 전람회 개최사용 신청을 하자 미군정청은 경복궁이건 덕수궁이건 어느 미술관도 사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다.9)

이 때 미군정청은 이왕가미술관을 한국인 직원 이규필(李揆弼)로 하여금 관리케 하였는데 이규필은 덕수궁미술관으로 개칭하고 관장에 취임했다. 이곳 소장 문화재는 1만점에 달했다.10) 그런데 조선미술건설본부는 해방기념 제1회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10월에 덕수궁미술관을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미군정청의 방침과 관계없이 다음과 같이 하여 해방기념전람회를 관철하고야 말았다.

당시의 오만한 이왕직(*황실재산관리총국) 장관을 턱받침을 하여 깡다짐으로 석조전의 정문을 열게끔 만들던 해방기념전의 패기야말로 우리들의 전진을 격려하는 채찍이 아니고 무엇이랴.11)

이렇게 해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주최하는 해방기념과 연합군 진주를 환영하는 《해방기념문화대축전 미술전람회》가 1945년 10월 20일부터 30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다. 97명의 작가가 동양화 23점, 조각과 공예 55점을 비롯 모두 132점을 출품했다.12) 김은호, 이상범, 김기창은 출품을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일제시대 때 친일부역 활동을 했던 경력 때문이었다.13)

열흘 간의 기간 동안 2만여 명의 입장객이 있었고 다수의 미장병도 내관 하였다. 14) 입장료는 1원씩이었다. 특히 <안창호>와 <여운형> 초상 조각이 출품되어 이채를 드러냈고, 출품작 가운데 50여점은 소품이었는데 이는 즉매하여 이 수입 전부를 전쟁동포를 위해 쓰기로 했기 때문이었다.15)

이인성은 <녹량>을 출품했는데 이 때 전람회 벽보를 그리고서 그 윗면에 “모든 권리는 인민에게”라는 글을 써넣었다. 고희동과 노수현은 좌경이라고 강력히 거부하는 사건도 일어났다.16) 그리고 전람회 출품작들에 일제시대 때 제작한 작품이 나온 일을 들어 일제잔재 청산이란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오지호 17), 이쾌대18), 구본웅19)이 서로 다른 입장을 펼치는 논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1946년 3월 덕수궁미술관이 수난을 겪었다. 미군정청은 석조전을 미소공동위원회 사무실로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미군공병대를 보내 수장고와 진열장을 마구잡이로 때려 부숴버린 것이다.20) 이런 와중에서도 덕수궁미술관은 계속 전람회를 해 나갔다.

1946년 6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조선공예가협회 주최 회원전이 열렸다.21) 또 같은 때 제1회 《전국한묵전》이 ‘대동한묵회’ 주최, 미군정청과 자유신문사 후원으로 1946년 6월 21일부터 7월 7일까지 덕수궁에서 열렸는데22) 미군정청이 후원하는 단체들이었으므로 덕수궁미술관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 해 4월에도 이충무공 탄생 기념전이 열렸다.23) 이렇게 미군정청이 덕수궁미술관을 계속 관장하자 이인성은 1948년 벽두에 미술인에게 맡길 것을 주장하는 일도 일어났다.24)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8년 11월에도 ‘서화동연회’ 주최로 제2회 《조선서화전람회》가 열렸는데25) 회원들의 신 작품 60여점과 시내 각 수장가들의 고서화 50여 점을 모아 진열한 전람회였다.26)

그런데 수장품의 양과 질이 국내 정상급임을 알고 있던 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면서 전국 각지에서 국보의 도난사건이 빈발함에 따라 덕수궁미술관은 전시를 중지하였지만 수장자들의 소장품을 출품 받아 여는 전시는 계속했다.27)

1949년 5월 고미술전람회는 이렇게 열린 것으로 석기시대 유물, 금속병용기 시대의 것, 삼국 이하 신라, 고려, 조선시대에 걸친 석기, 동철기, 불상, 도자기, 목공품 및 서화 등에 걸쳐 40여 수장가의 애장품 270점이었다.

전형필은 김정희의 글씨 <명선(茗禪)>, 이병직은 김정희의 <고경당(古經堂)>, 유복열은 길유뢰(吉幽賴)의 <설경산수>를 출품했다.28) 덕수궁미술관은 1950년 1월 국립박물관 미술연구회 제1회 공개강연회 장소로 사용되었다.29) 이를 시작으로 매월 1회씩 열린 미술연구회 발표회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덕수궁미술관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국립박물관과 더불어 부산으로 소장자료와 함께 이관했다. 이때부터 덕수궁미술관은 국립박물관에 곁방살이를 하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환도와 함께 서울로 옮겨왔으나 덕수궁 석조전이 화재로 폐허가 되어있었고 따라서 국립박물관을 따라 다녀야 했다.

국립박물관도 경복궁으로 복귀하지 못한 채 과거 국립민족박물관 건물이었던 국립박물관 남산분관으로 들어갔으나 1954년 11월 복구한 덕수궁석조전으로 이사를 했다. 이 때 덕수궁미술관도 덩달아 이사를 했으니 실제로는 복귀한 셈이었다.

덕수궁미술관 입장으로 볼 때 덕수궁 석조전은 구황실재산관리총국 관할 아래 있는 궁궐의 건물이었고 덕수궁미술관은 문화재관리국 소속이었으므로 국립박물관은 손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국립박물관 김재원 관장은 이승만 대통령과 독대를 하면서 국립박물관 중심으로 상황을 조성해 나갔다.

이에 대응해 문화재관리국은 1966년 종합박물관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에 대해 김재원은 국립박물관까지 병합하려든 것이었다고 회고하고 오히려 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이 국립박물관과 비슷한데다 덕수궁미술관은 전문인력도 없으므로 국립박물관으로 병합하길 희망했던 듯 하다. 결국 1968년 7월 24일 국립박물관은 덕수궁미술관을 흡수 통합해 버렸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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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총무부, 「8.15이후의 미술계의 정세 보고 및 조형예술동맹의 결성」, 『조형예술』1, 조선조형예술동맹, 1946.
10) 최순우, 「해방이십년-미술」, 『대한일보』, 1965.5.27-6.8.
11) 이쾌대, 「고갈된 정열의 미술계」, 『민성』, 1949.8.
12) 민주주의민족전선, 「예술, 미술」, 『조선해방연보』, 문우인서관, 1946.10.
13) 김영기, 「해방 이후의 동양화단」, 『한국의 근대미술』, 제4호, 1977.4.
14) 총무부, 「8.15이후의 미술계의 정세보고 및 조형예술동맹의 결성」, 『조형예술』 1, 조선조형예술동맹, 1946.
15) 「해방미술전」, 『자유신문』, 1945.10.20.
16) 장우성, 「화맥인맥」, 『중앙일보』, 1982.
17) 오지호, 「조선미술과 일본적 독소」, 『예술』, 1945.12.
18) 이쾌대, 「해방기념과 조형예술동맹전」, 『조형예술』 1, 조선조형예술동맹, 1946.
19) 구본웅, 「해방과 우리의 미술건설」,『한국의 근대미술』, 1호, 한국근대미술연구소, 1975.11.
20) 김재원, 『경복궁 야화』, 탐구당, 1991.
21) 오지호, 「해방이후 미술계 총관」, 『신문학』, 1946.11.
22) 「전국한묵전 7월 7일까지 연기」, 『자유신문』, 1946.6.28.
23) 「충무공기념전」, 『자유신문』, 1947.4.26.
24) 이인성, 「중대한 변환기」, 『자유신문』, 1948.1.5.
25) 「고서화전람회 비장품을 공개」, 『자유신문』, 1948.11.4.
26) 「서화전람회」, 『동아일보』, 1948.11.5.
27) 김용준, 「고미술 계몽의 의의」, 『조선일보』, 1949.5.31-6.3.
28) 김용준, 위의 글
29) 「인천박물관장 이경성씨 강연회」, 『자유신문』, 1950.1.12.
30) 김재원, 『경복궁 야화』, 탐구당,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