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수궁의 미술관 역사와 국립근대미술관 구상 |
| 최열(미술평론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회원) |
| I. 머리말 II. 본 문 1.덕수궁과 미술관 2.덕수궁미술관 시대 3.국립현대미술관의 출범과 정체성 4.국립현대미술관과 덕수궁 석조전 5.직제의 비전문성 |
6.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의 기형성 7.덕수궁 분관 개관 8.덕수궁미술관 직제개정의 의미와 현황 9.국립근대미술관을 향하여 III. 맺음말 * 도 판 | |
| II. 본 문
6.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직제의 기형성
2. 관장은 문화공보부장관의 명을 받아 소관업무를 처리하며, 소속공무원을 지휘 감독한다. 3) 제3조(공무원의 정원) 미술관에 두는 공무원의 정원은 별표와 같다.
2. 사무국장은 부이사관으로, 각 과장은 서기관으로 보한다.
2. 관인관수 3. 문서의 수발, 통제, 보존 및 관리 4. 공무원의 임용, 복무, 교육훈련, 연금 기타 인사사무 5. 예산, 회계 및 세입에 관한 사항 6. 물품 및 국유재산의 관리 7. 주요사업계획의 수립, 종합 및 심사분석 8. 청사의 방호 및 시설의 관리 9. 기타 다른 과, 실의 주관에 속하지 아니하는 사항
2. 상설전시, 기획전시, 대관전시 및 국제전시에 관한 사항 3. 전시실의 운영 4. 소장미술작품의 관리 5. 국내외작가 창작활동의 지원 6. 미술관분관의 전시에 관한 사항
2. 미술활동의 보급 및 확대 3. 학술도서 및 자료의 수집, 출판, 관리 4. 미술도서 및 자료의 국제교류 5. 미술전문인력의 양성
2. 미술작품 및 자료의 발굴, 조사 3. 미술작품의 보존과 수리, 복원에 관한 사항 4. 미술작품의 감정에 관한 사항42) 학예연구실은 모두 15명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학예연구실의 업무로 자연 통폐합되었어야 할 전시 업무가 여전히 전시과에, 교육 업무는 신설 섭외교육과에 분장됨으로써 정상화가 아닌 기형화를 결과하였다. 물론 학예연구실의 신설은 획기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반쪽 또는 그 아래 수준의 절름발이 학예연구실이 탄생한 것은 감출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이와 같은 방대한 양의 작품을 처리하자니 그야말로 잠잘 새도 없었다. 다행히 이때에는 큐레이터로서 유준상, 박래경을 비롯해서 안소연, 김현숙, 이윤신, 이화익, 박규형, 김은영, 이인범 등이 있어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43) 신설 학예연구실의 신임 학예사들은 미술관 이전과 더불어 학예업무를 시작했는데 이 때 이전기념전인 아시아현대미술전을 비롯 모든 전람회는 이미 전임 김세중 관장이 기획해 놓은 것들이었다. 이경성 관장의 지적대로 이미 기획해 둔 전람회를 정신 없이 수행해 나갔거니와 결국 초기 학예업무란 전시과가 주도하는 전시관련 부분업무를 수행하는 것이 다였다. 이경성 관장은 1986년부터 해외 연수를 강력히 추진하여 매년 학예실 요원 연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또한 강정식, 김달진, 유순남으로 하여금 작품의 보존, 수복과 미술관 자료 업무를 추진하게 하였고 취임 당시 273점에 머물렀던 소장작품을 기증과 구입의 재촉으로 급격히 늘려나갔다. 이처럼 전문 미술인 관장 아래 학예사 직제의 도입 시대를 맞이하여 국립현대미술관은 안팎으로 기형스런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그러나 미술관이 과천에 자리를 잡으면서 시민 접근권이 제약 당함에 따라 비판의 수준이 극단화하였다. 실제로 각오하지 않으면 미술관 관람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불편함은 신군부독재정권의 무지한 판단이며, 군사문화의 산물이라는 추론이 널리 퍼뜨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떠나면서 덕수궁 석조전은 이른바 순수미술과 무관한 역사 속의 건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곧장 문화재관리국과 같은 문화관련 기관이 자리를 잡았지만 덕수궁은 미술의 향기를 잃어버린 채 길고 긴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어 가야 했다. 그나마 궁중유물전시관이 황실의 추억을 되살리는 정도였다. --------------------------------------------------------------------------------------------------- 42) 「국립현대미술관 직제(대통령령 제12341호)」, 1986.8.18. 43) 이경성, 앞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