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I. 본 문
7.덕수궁 분관 개관
1997년 미술계 일각에서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 장소로 덕수궁 석조전이 유력하게 떠올랐다. 이와 같은 여론을 받아 1998년에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절차를 밟았으나 IMF체제 속에서 작은 정부라는 방침에 따라 국립근대미술관 설립 구상이 축소되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분관으로 결정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은 1998년 4월 덕수궁분관 설치계획안을 장관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승인을 얻어 8월에 덕수궁 석조전 서관을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관리전환을 받아 10월까지 건물 개보수 공사를 완료하고 인력은 과천 본관 인력의 파견 형식으로 충원하여 12월 개관에 이르렀다.44)
파견 인력은 1999년 1월 12일 제정한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운영지침 내규 제27호>
45)에 근거하여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그 뒤 2000년 8월 <국립현대미술관 사무분장규정>을 개정하여 신설된 제6조 2(덕수궁분관) 조항을 마련했다. 신설 규정 개정안은 다음과 같다.
1) 제6조 2(덕수궁분관) 덕수궁분관은 다음 사항을 분장한다.
1. 근대미술 전시
2. 근대미술 교육
3. 근대미술 문화, 학술 행사
4. 근대 우수 미술작품 발굴 및 조사연구
5. 촬영허가
6. 청사 및 시설관리 유지
7. 일용직원 및 용역직원 관리
8. 인턴 및 자원봉사자 관리
9. 기타 매수표, 세입 업무 및 서무 등46)
최초의 분관은 그야말로 소규모 전시 공간일 뿐이었다. 초대 김희대 분관장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관 신분을 유지한 채 몇몇 공무원과 학예사를 임시로 파견 받아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정식 직제에 따른 인력 운영이 아니라 미술관 내규에 따르다 보니 그런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근대미술 전시조차 힘에 버거운 터에 교육, 행사, 발굴, 조사연구 업무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석조전 서관의 1층에는 여전히 국립국어연구원이 자리잡고 있어 사무실은 물론 전시장조차 옹색한 상황이었고 따라서 강당은 관외에 가건물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2000년 8월 국립국어연구원이 이전해 나감으로써 석조전 서관 전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무실, 회의실, 귀빈실, 중앙감시실과 시청각실(도판3), 강당(도판4), 정보검색실(도판5)에 수장고까지 갖추기에는 여전히 비좁은 상태였다.
그런데 덕수궁 분관은 덕수궁미술관이란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1년 초에 만든 리플렛에 따르면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형성과 전개과정을 체계화하여 근대미술에 나타난 미의식과 역사관을 정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분관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 연구, 작품의 수집과 보존, 기획 및 상설전시,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사업을 추진’하는 기관이라고 성격을 규정해 놓았다.
이와 같은 목적과 성격에 따라 분관은 개관 초기인 1998년 12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3년 동안 15회 전람회를 통해 관람객을 모두 148만 명이나 유치했다. 해외전 3회를 제외하면 모두 근대시기 한국미술을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자리를 잡았고 또한 퍼포먼스, 음악회, 마임과 같은 공연 및 강연회를 개최함으로써 시민의 미술문화시설로 급격히 자리를 잡아갔다.
▣ 덕수궁분관 관람객 현황 (1998.12-2001.6.)
1) 1999년
1. 《다시 찾은 근대미술》
2. 《한국근대회화명품전》
3. 《한국근대미술:조소》
4. 《한국근대미술:공예》 (총 27만명)
2) 2000년
1. 《작고작가 드로잉전》
2. 《심산 노수현 탄생100주년기념전》
3. 《한러수교10주년기념전》
4. 《오르세이걸작전》
5. 《고야판화전》 (총 52만명)
3) 2001년
1. 《근대명품전》
2. 《원로작가 드로잉전》
3. 《석지 채용신 서거 60주년기념전》
4. 《배운성전》
5. 《권옥연전》(도판6)
6. 《김정숙전》(총 69만 명)
개관 초기의 성과는 관객 동원만으로도 목표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언론의 상당한 반응과 시민의 폭발적인 호응은 대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획득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시 기획력과 출품 작품의 수집, 전시공간 연출 기술은 성공적이었다. 성공의 요인은 도심의 궁중 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환경 요인과 더불어 세기가 바뀌는 과정에 지난 세기를 추억하는 대중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기획력과 또한 그와 같은 관심을 이끌 수 있는 소재인 근대미술이 결합되어 있었던 때문이다.
이러한 특성은 근대미술 전문 미술관이라는 특성화와 차별화 전략이 적중했던 것인데 이후 열린 모든 기획전람회도 모두 같은 성격의 연장이었다.
2001년 9월부터 열린 《배운성전》은 일반인에게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작가로 호기심을 던져 주었고, 11월에 열린 《김정숙전》은 여성 추상조소예술의 선구자로 관심의 표적이 되었다. 2002년 2월에 열린 운보 그림전은 대중적 지명도가 매우 높은 《바보천재 김기창 서거 1주년 기념전》이었으며, 9월부터 열린 《도상봉》과 《류경채》 전람회는 근현대 미술의 흐름을 이어가는 전람회였다.
그 밖에 연이어 올해의 작가로 선정된 《권옥연》, 《전혁림》 전람회가 열렸으며,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한국근대회화100선전》도 마찬가지였다.47)
---------------------------------------------------------------------------------------------------
44) 최은주, 「국립기관으로서의 근대미술관 설립 방안에 관한 연구」, 『현대미술관연구』, 제11집, 국립현대미술관, 2000.
45) 「국립현대미술관운영지침, 제정 1999.1.12. 내규 제27호」, 『국립현대미술관규정집』, 국립현대미술관, 1999.
46) 「국립현대미술관 사무분장규정」, 『국립현대미술관규정집』, 국립현대미술관, 2000.
47) 그밖에도 2002년 7월에 한중일국민교류의 해 기념 특별전으로 《중국 근현대 5대가 회화전》이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