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 형식주의의 인식론적 지평과 올바른 예술방법의 단초.

심광현(서울미술관 기획실장)

Ⅰ. 머릿글
Ⅱ. 포스트모더니즘
    1) 미적 질서와 개념에 있어서의 단절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자기 모순 -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론

    3) 지식(또는 인식)과 권력
    4) 권력에 익명성과 주체의 부재
Ⅲ. 리얼리즘
    1) 권력의 도구로서의 재현
    2) 포스트모더니즘 소비사회
    3) 구체적인 사회생활로서의 역사에로의 복귀
    4) 리얼리즘의 방법과 예술의 진보성

전 망

Ⅰ. 머릿글

유토피아가 시작된다. 의미와 섹스는 자유로운 놀이의 대상이 되며, 그 한가운데 이항 대립의 감옥에서 해방된 수많은 의미를 지닌 형식과 감 각적 실천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렇게 해서 사치스러운 문체의 텍스트와 행복한 성(性)이 탄생된다.

후기구조주의 이론의 독특하고도 극단적인 양상의 하나는 자아의 해체이다. 통합되고 안정된 존재나 의식의 자리에 자아들의 다면적이고 와해적인 놀이가 들어서며, 이런 해체된 주체의 개념은 '저자', '독자', '비평가' 모두에게 해당된다.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 기호학적 구조주의의 가장 강력한 사제였으며, 설득력 있는 구조주의와 유연한 마르크스주의를 채용하여 부르조아적 생활양식과 물화된 사유를 공격해왔던 롤랑 바르 트가 1960년대 후반 프랑스의 다른 지도적 지식인들, 특히 (텔 켈) (Tel Quel) 誌와 관련된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해체론 쪽으로 방향전환하게 되면서, 그의 분석적 실천은-마르크스, 사르트르, 브레히트로부터 소쉬르를 거쳐 크리스테바와 데리다.

솔레르스, 그리고 마지 막에는 라캉과 니이체에게로 옮아가면서-마르크스주의적 문화비판에서 기호학적 구조 주의를 거쳐, 다시금 (텔 켈)의 해체론으로, 그리고 나서는 쾌락적 해체론으로 나아간다. 그 결과 그가 사유하는 대상도 '역사'와 '진리'에서 '유효성'과 '진리'에로 다시금 '부분적 텍스트성'과 '산포'(dissemination),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무한한 텍스트성'과 '쾌락'으로 변모한다. 바르트는 자신의 존재에서 내용을 지워버린다.

그에게 있어서 자아란 지우는 작업이다. "우리는 해석하는 사람이 누군가고 물을 권리가 없다. 그것은 열정으로서 존재하는(존재가 아니라 과정, 되어감으로서의), 권력을 향한 의지의 한 형태인 해석 자체"라고 하는 니이체의 주장에 의거하여 바르트는 '쾌락을 위한 독자'라는 유형학을 지시하며,물신숭배자, 강박증 환자, 편집증 환자, 히스테리 환자라는 네 가지 부류의 독자 중에서 히스테리적 독자만이 이드(id)를 낱낱이 드러내면서 진정한 기쁨인 오르가즘의 경험에 도달한다고 기술한다.

이런 유형의 독자에게 텍스트는 의미와 성(性) 의 자유로운 유희를 허락하며, 이런 과정에서 독자와 의미는 무한을 향해 찬란하게 분산, 와해된다. 텍스트는 영원히 뒤섞이는 가운데서 성취되며. 이 직물조직 속에서 길을 잃은 주체는 스스로를 와해한다. 이러한 자아의 상실이 오르가즘이다.

여기서는 정확한 절단과 비평의 기준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경계선이 없는 무한한 텍스트는 편의상 말끔한 형상과 지역으로 갈라지고 나누어지며, 이 조각들이 기표들의 질주와 잡다한 양태의 인용문, 즉 텍스트와 상호텍스트를 산출한다. 이 텍스트의 기표(signifiant)들은 무한을 향해 움직이며, 이 텍스트의 쾌락은 오르가즘적 행위에 해당된다.

더 이상 단순히 하늘의 공허를 읽는 고집 세고 초탈한 예언가가 아닌 해체론적 독자는 넘치는 갖가지 사랑놀이에서 쾌락과 기쁨을 찾는 호 색적이며 열망하는 육체와도 같다.

그는 성적인 광인으로서 끊임없이 텍스트를 자르고 분할함으로써 주의 깊고 올바른 해석을 한 뒤에 텍스트를 되돌려주는 강박적인 예언자와 같을 뿐만 아니라 자신 텍스트로 전회의 만족을 지속시키고 연장시키는 물신숭배적 독자와도 같고, 텍스트의 광란적이며 완벽하게 미혹된 독서에 스며든 편집중 환자와도 같으며 과다한 진리와 기쁨 속에서 맹목적이면서도 거칠게 텍스트와 와해되는 자아를 떠받드는 히스테리 환자와도 같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텔 켈) 그룹 시기만 하더라도 바르트는 텍스트성에 관한 이론을 세우면서도 이념적 근거에서 통제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기의(signifie)를 배제 하고 기표(signifiant)를 완전히 해방하는 것은 결국 모든 의미를 거부하는 것이며, 이런 전략은 정치적 실천을 거부하는 쁘띠부르조아적 자기 탐닉의 조장행위로 간주되었었다.

그러나 후기의 바르트는 통제를 풀었으며, 초기에는 진보적 이념을 생산하기 위한 장기적 인 목표로 간주되었던 혁명적 독서가 독서행위의 성적 만족에 대한 찬미로 대체되었다. 해석의 내재적 틈새와 오류는 오르가즘적 환희를 내뿜는 끝없는 연 위의 벼랑으로 나타난다. 분석적이며 일관성이 있던 예전의 비평적 글이 장난스럽게 파편화되며 비평의 수사는 에로스적인 환상의 떨림으로 변모한다.

"부재하는 기원의 잃어버린 또는 불가능한 현존에로의 복귀를 애태우는 조각난 직접성이라는 이 구조주의적 주제는 슬프고 부정적이며 향수어 리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놀이를 생각하는 룻소적 측면이다.

이와 반대 되는 측면은 니이체적 긍정으로서 세계가 놀이화되어가는 것과 적극작인 해석에 수반되는 '허구', 혹은 더이상 진리와 기원이 존재하지 않는 기호들의 세계를 순수히 받아들이는 태도이다‥‥이처럼 해석과 구조, 기호와 놀이에는 두 개의 해석이 있게 된다.

하나는 암호를 해독하고자 하며 놀이와 기호의 한계를 넘어서는 해석의 필요성과 진리 또는 기원을 해독하고 싶어하는 망명자. 다른 하나는 더 이상 기원이 무엇인지 묻지 않으며 놀이를 긍정하고 인간과 휴머니즘을 넘어 서고자 한다."

예언자로서 쟈크 데리다는 우리에게 해체적 인간을 선보이는데 그는 기쁨과 긍정에 차서 세계가 놀이화되어 가는 순수함을 받아들이며, 중심의 주변에서 기표들의 자유로운 놀이와 구조의 편향적 생산을 추적하고, 낡은 이성중심주의의 마법을 비난하면서 억압적인 기호학을 밟고 넘어서서 기쁨과 긍정이라는 모독을 선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과 긍정은 문자 그대로 순수한 현존의 기쁨과 긍정이 아니다. 훗설이 어떤 매개작용이나 의미화의 작용 없이도 가능하다고 본 자기현존의 원초적 구성을 꿈꾸는 곳에서 데리다는 (차이)와 (흔적)을 목격한다. 글쓰기가 존재론을 침범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원초적 변 별화를 드러내는 힘이 존재와 현존을 움직이고 생산한다.

여기서는 (차연) (differance)의 두 가지 특징인 (지연)의 구조와 (차이) (기표와 기의, 기의와 지시물간의)에 의해 현존의 윤리가 붕괴되며, 기호에는 실질도 현존도 없이 (차이)들의 놀이만이 존재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전통적으로 해석 행위를 안정화시켜온 현존하는 실체로서의 진리는 그 초월적 의미화의 중심을 파괴시키는 (차연)의 놀이에 의해 붕괴되며, 사물들간에 벌어진 틈새, 떨어져 나가는 불안정한 작업들, 시간의식을 파괴하는 파편적인 힘들이 전면화된다. 이들은 모두 동질적이고 자기 현존적인 온갖 집합체를 뒤흔들어 놓는다. 바로 이때 우리는 벼랑에 서게 된다.

초기에 데리다는 끝없이 (잘못된)해석을 '유쾌한'것으로 생각했었다. 그것은 무한성을 향해 단절하고 또한 배열시켰던 행복한 증폭이었다. 그러나 이제 말할 것도 없이 해체 론자들은 모두 벼랑 위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 해석의 막다른 골목, 즉 비평적 독서와 글쓰기가 처하게 된 곤경을 지칭하기 위해 해체론자들이 자주 쓰는 개념이 아포리아(apo- ria)이다.

가령 모든 텍스트가 그 자체로서 해체이고 일단 한번 해체의 대상이 되면 어느 곳에서든 목적지는 보이지 않게 된다. 이것이 아포리아의 구조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바르트의 유토피아는 실제로 벼랑 위에서 전개되었으며, 의미와 섹스의 자유 로운 놀이는 결국 아포리아의 다른 명칭에 불과하였다.

아마도 이러한 아포리아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과 밀접한 연관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구조주의이든 탈(또는 후기) 구조주의이든 양자는 모든 것을 언어에 -말이든 글이든 -의해 다시 한번 재고찰하려는 시도, 말하자면 사유의 모델로서 언어를 채택하려는 사 고체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이 언어학적 모델의 우월성을 그 출발점으로 설정하는 일은, 오늘날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나라들의 사회생활의 구체적 성격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 나라들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의해 본연의 자연이 추방당한 세계, 메시지와 정보로 가득 차 있는 세계라는 구경거리(스펙타클)를 제공하고 있으며, 그들이 가진 복잡한 상품조직망은 기호체계의 원형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서의 어학과 오늘날 우리의 체계화되고 몸체잃은 악몽으로서의 문화는 서로 일치하는 면이 많다.

말하자면 의미와 섹스의 자유로운 유회로서의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끝없는 (차연)으로 서의 심연 위에 놓여진 벼락이며, 벼랑위에 선 해석자는 끊임없이 붕괴되는 사물들의 틈새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포리아에 직면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런 아포리아는 애당초 스스로 설정했던 언어학적 모델의 독단적 우월성으로 인해 야 기되었던 것이다.

그 아포리아는 스스로를 수감시킨 언어의 낡은 감옥 안에서 야기된 것에 불과하였다."누군가 지시물을 훔쳐낸 결과 세상에는 미끄러지는 기의 (signifie)와 부유하는 기표(signitiant)들만이 가득차고 말았다. 누가 지시물을 훔쳤는가? ‥‥모두가 데리다를 쳐다보고 있다‥‥그가 문제의 인물이다‥‥의심할 것도 없이 소쉬르가 그에게 가르쳤을 것이다. 하이데거와 훗설, 레비-스트로스는 부지중에 잠재적인 함정을 가리켜주었을 것 이다. 또 바르트와 리들은 데리다와 같은 노선을 걸어왔다‥‥지시물은 어디에 있는가?

지시물이 없는 상태에서 기표들은 대기를 울려댄다. 우리는 숨이 막힐 것 같다. 진리의 공기가 소진되어 버린다. 모든 것이 흔란스럽게 되고 세계는 미쳐 돌아간다." 문제의 원인은 사물들의 세계로부터 의도적으로 차단된 -쁘띠부르조아의 안전한 유 토피아인-언어의 `감옥'에 놓여 있었다.

이 감옥 안에서 "의미화는 따라서 언어의 한 차원에서 다른 차원에로의,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에로의 이항에 불과하며, 의미는 이같은 약호이전의 가능성일 뿐이다.

" 언어의 감옥 내에서는 이러한 약호이전이 끝나지 않으며, 이와 같은 끝없는 후퇴구조는 바로 구조주의자 또는 후기(탈)구조주의자들의 "문체론적 차원에서의 불행한 의식"이다. 이들의 "불행한 의식"은 자신들의 이론적 이율배반을, 또한 자신들의 아포리아를 무기한으로 연기시키거나 망각에 빠뜨린다. 변증법적 의미에 서의 구체적인 것을 불연속적인 것, 특수한 것으로 대신하며, 개별적인 자료를 고립시켜서 그것이 총체성과 가지는 관계를 파편화시키며 결국 총체성은 보이지 않음으로써 다루어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기껏해야 언어학적 모델의 개념적 감옥의 벽을 더듬 거리면서 내부로부터 그 감옥을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떠한 언어의 감옥도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지는 않다. 그 감옥에는 수많은 구멍이 뚫려있으며 그 구멍을 통해 역사의 바람이 항상 불어오고 있다. 해체론자들이 이 바람을 정면으로 맞게 될 때 해체론의 언어학적 모델이 본격적으로 해체될 것이다. 그러나 해체론자들은 아직도 불어닥쳐오는 역사의 바람을 텍스트성(textuality)의 얇은 피막으로 또는 상호텍스트성이라는 어지러운 거미줄로 막아내려 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의 바람은 결코 해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감윽이나 텍스트성의 벽에 의해 차단되어야 할 유해물질이 아니다. 또한 일시적으로 차단된다고 해도 그러한 차단이 결코 지속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거세게 몰아치는 역사의 바람이야말로 언어와 기호에 대해 생명과 생기를 부여해 주는 원천이며, (차이)와 (흔적)의 생생한 원천이다. 지시물이냐 기호냐, 기표냐 기의냐 하는 식의 양자택일, 현존인가 부재인가, 중심인가 탈중심인가, 구조인가 놀이인가, 구조화인가 해체인가, 룻소적 향수인가 니이체적 긍정인가, 이성중심주의인가 탈이성중심주의인가, 순수존재인가 순수언어인가, 동일성인가 차이인가‥‥이러한 양자택일들은 언제나 고사되어가는 언어의 메마른 감옥 내에서만 일 어날 뿐이다. 구조주의와 탈구조주의 양자가 공히 이에 해당된다.

이를 좀더 정확히 말 하자면 관념론의 감옥, 형이상학적 또는 주관적 심리의 (유토피아에 갇혀있으며, 동시에 그에 의해 세계를 재구성하고 싶어하는 쁘띠부르조아적)의식의 감옥이라고도 기술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론적 모델이 예술에서도 유사한 양상을 띄고 나타나는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에서도 역시 한 치의 예외가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 모두는 동일한 철학, 동일한 인식구조 내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행동양태들이다.

이 글은 최근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이론적 논의들을 검토해보면서 이와같은 필자의 입장을 확인해 보고, 이런 논의들에 내재된 유해성을 극복하고 우리의 현실에 적절하면서 생산적일 수 있는 인식론의 모델과 그와 연관된 예술창작방법론의 단초를 찾아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물론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의 논의는 제임슨의 말대로 20세기 서구사회의 정치경제적-문화적 구조와 실행의 광범위한 역사적 짜임관계를 검토하는 접근방법을 통해서만 옳게 파악될수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주로 그 인식론적인 전제를 검토하는 것에 목표를 한정하고자 하며, 따라서 그런 만큼 일정한 의의와 동시에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