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 형식주의의 인식론적 지평과 올바른 예술방법의 단초.
심광현(서울미술관 기획실장)
1) 권력의 도구로서의 재현
벨라스케스의 최고 걸작으로 알려져 있는 유명한 그림인 (시녀들) (1956)은 통상적인
회화의 구도와는 달리 화가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자의 관점(그 그림을 바라보는 감상자의 관점)에서 보여지는 정경이 그려져
있다.
그 그림에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화면의 좌측에 잘리워져 있는 캔버스 앞에
서있는 화가와, 화면 중앙에 감상자인 우리를 향해 서있는 공주와 그 좌우의 시녀들, 화면
우측에 서있는 난쟁이와 그 앞에 앉아 있는 개, 그리고 뒷쪽에 열려 있는 문 사이의 방문객과 그
옆의 거울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왕과 왕비의 모습들이다.
어찌 보면 그저 사실적인
필치로 단지 특이한 구도를 갖춘 정도로만 보이는, 이 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걸작품에
대한 푸코의 분석은 독특하다.
'여기에는 기교들의 어떤 교묘한 체제가 존재한다‥‥마치 그 화가는 자
기를 담고 있는 그림에 나타나는 동시에 그가 어떤 것을 표현하고 있는
그림에 한꺼번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것 처럼.
그러나 고는 이 두개의 서로
양립할 수 얼는 가시성(可規性)의 문지방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단
순히 상호성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한 폭의 그림을 보는가 하면 그 그림
속의 화가도 그림 밖의 우리를 본다는 단순한 문제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상호가시성이라는 이 가느다란 선은 불확실한 것과 교환과 전위
(轉位)같은 것들로 구성된 복잡한 조직을 전체적으로 포팔한다.
"푸코는 복잡한 조직을 차근차근 분석해 낸다. 우선 그림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전혀
그림 속에 수용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그림을 수용하고 있는 모든 시선에 의해 전제되어
있는 장소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자세히 보면 그림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의
곽경을 응시하고 있으며, 거꾸로 이 광경에 대해서는 그 자체가 하나의 광경이 되고
있다. 여기서 바로 관찰되고 있는 거울과 관찰하고 있는 거울은 서로 순수하게 상호성을
보여 준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이 그림의 맞은편의 광경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 바로 그림의 됫쪽 거을 속에 비친 왕과 왕비라는 사실이다.
이들은 그림에
나타난 도상들 중에서도 가장 희미하며 또 비실재적이고 의문스러운 상이지만, 그림
밖에 놓여적 있음으로써 본질적인 비가시성으로 위축되어 있으면서도 모든 표상의 중
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중심축은 3가지 응시하는 기능.
즉 화가의 시선, 감상자의
시선, 그리고 화가의 모델의 시선이 서로 겹쳐지는 중심으로서 실제로는 그림 밖에 놓여져
있다. 말하자면 이 모든 명백한 그림의 표상들은 사실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지시된
하나의 본질적인 '부재'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에 의하면 벨라
스케스의 이 그림 속에는 고전주의 시대의 표현법에 대한 표상과 그 표상이 우리 앞에
열어놓은 공간에 대한 정의가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크레이그 오웬스는 고전적인 재현회화에 대한 푸코의 분석에 깊이 공감하면서, 푸코가
주목하고 또 보여주고자 한 것은 바로 재현이 무엇을 드러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임을 잘 기술해주고 있다. 고전적 재현에 있어서
주체는 결코 자신이 주재하는 광경이 재현되어 있는 화면 안에 결코 직접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창문을 통해 그 광경을 내다볼 뿐이다.
그러나 그가 직접 재현
자체 내에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해도 다른 방식으로 가령 거울을 통해 대치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첫번째 방식에서 주체는 일점원근법의 체계 내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사물을 투시 한다(Transparency).
그럴 경우 재현은 그 자신의
시각과 사고의 한 양식이 된다. 그러나 두번째 방식에서는 주체적인 시점이 사라지고
세계는 예술가의 개입 없이도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재현의 고전적 체계안 에서 재현의
주체는 전적으로 군주에게 주어지며, 궁극적으로 회화가 재현하고 있는 것은 화가의
시선이 아니라 왕의 시선인 것이다. 우리는 그가 보는 것 이상도 그 이하도 보지 못한다.
이와 같은 재현의 개념은 플라톤 이래 서구예술사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치부되어 왔던
모방으로서의 재현 이라는 공식적인 예술사의 개념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동기를 부여해 준다.
작가와 감상자 그리고 이미지와 지시물의 복잡한 관계를 괄호치운
채, 단지 현존하는 이미지 즉 재현되어 있는 대상 자체만을 재현의 고유한 속성으로
간주해온 전통적인 재현 개념에는 실은 상기한 바와 같이 투시성(Transparency) 또한
창문으로서의 회화라는 관계와 거울로서의 회화라는 관계의 복합이 내재해 있다.
투
시성의 개념은 재현된 대상의 물리적 특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그것을 가능케 해준
재현과정, 또 그런 과정 속에서 삭제되거나 숨겨진 대상및 행위 그리고 재현행위의 목표와
의도를 주목케 해준다. 이러한 투시관계가 밝혀질 때 거울로서의 회화에 재현되는 표
상들의 의미는 더욱 증폭되며, 거울에 반사되는 표상들의 관계는 복잡한 투시의 조직,
푸코의 말에 의하면 권력의 그물망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예술들은 모더니즘에 의해 배척당했던 재현 개념을 정당하게
(?) 복구하며, 시각 이미지를 (지시물)기표기의의 복합층위의 관계로서 해석하고 또
형상화해내고 있다. 이런 경우 그 형상화의 양식이 추상이건 구상이건 그것들은 모두
기호의 의미화작용이 발생하는 문화적 맥락 내에서 현상되는 리얼리티를 일정하게 재
현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리얼리티들은 오직 '문화적' 재현에 의해서만 산출되고
유지되는 가공품으로 간주된다. 투시성의 개념에 기초해서 저항적인(또는 비판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이미지와 형상들을 다루면서 그것들 자체가 이미 권력의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식한다.
예술가들은 그 안에 약호화되어 있는 이념적 메시지를 탐구할
뿐만이 아니라, 그같은 이미지들이 우리 문화 안에서 권위적인 지위를 보장받게 해주는
전략및 전술을 탐구한다. 만일 이미지들이 효과적인 문화적 설득력의 도구라고 한다면,
이미지 안에서 리얼리티가 스스로 이야기하면서 나타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지에
부여된 억압적인 물리적, 이념적 지지 기반을 새롭게 해체할 필요가 있게 된다. 또한
양식상의 차용, 조작, 패러디의 사용 역시 고전적 재현논리의 투시성의 전거를 통해
비가시적인 메카니즘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수 있도록 동원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1980년대에 들어 "리얼리즘의 복권"이라는 말로 흔히 불리워지곤 한다. 물론
이 복권이라는 것이 19세기 식의 리얼리즘의 완벽한 부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리얼리즘적 경향들은 복잡한 기호화-의미화- 작용의 복잡한 메카니즘을 통해 과거의
그것과 구별되며, 또한 투시성의 주체와 과정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도 과거와는 구
별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에서 보여지는 이러한 흐름들이 실제로 올바르고도
바람직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