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 형식주의의 인식론적 지평과 올바른 예술방법의 단초.
심광현(서울미술관 기획실장)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자기모순 -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론
데리다에 의하면 "초월적이거나 특혜를 누리는 기의(signifie)란 없으며, 따라서 의미의
영역이나 작용에도 한계가 없다. 기호라는 말 자체도 거부해야 한다. 그것은 정확하게
다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 오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해체에 대한 충동은 모
더니즘의 자기 비판적 경향과도 구별되어야 한다. " 매체에 집중된 자기비판은 (적어도
형식주의의 보호아래) 본질적인 것 혹은 `순수한'것을 지향하고 있는 반면, 해체는 의미의
`비순수성'을 분석시켜 노출시킨다.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이 단지 양식적이거나 연대기적인 용어로서가 아니라 `인식론
적인 단절'로 간주되고 있는 것을 볼 때,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지식의 형태-또는 그 물적조건-에 기초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분명히 1960
년대 말 프랑스에서 발흥된 후기구조주의와 해체론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으며, 모더니
즘-포스트모더니즘의 관계는 인식론적으로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의 관계와 상응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때로는 편협한 양식적 의미로, 또는 복고적인 역사주의의 의미로
인지되는 또는 수많은 소규모 형식들과 범주들의 상층되는 층위들간의 복합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는(때로는 자기 모순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개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에 내재된 좀더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인식론적 방법 개념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보다 정교한 이해를 위해서는 후기구조
주의에 대한 철학적 이해가 요청된다.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후기(또는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중요한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외부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말하자면 후기구조주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로부터 (해체) 또는 (탈구조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조보다는 개체
역사성에 대한 새로운 관심, 절대적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가 아닌 타자와 탈
중심화 등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차이점 중에서도 구조주의와 후기(탈) 구조주의를
구별짓는 가장 큰 차이점은 기호들의 재현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과
`기호-대상'의 연계성이라는 이상주의적인 가정의 붕괴이다.
탈구조주의는 바로 구
조주의의 그런 이상주의적인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기호)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며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 일시적으로 유보된 상태일 뿐이라는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되어졌다.
데리다는 우선 구조주위자들의 (구조)나 (기호)라는 개념이 (의미)의 (센터)가 (현존)
하고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센터)에 대한 이러한 욕망과 확신은
구조주의를 포함하여 서구 형이상학의 근간을 이루어 온 것으로서 실제로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다만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그것의 (흔적)과 (자취) 또는 (대체물)만이 가능할
뿐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말하자면 말이든 글이든 모두가 현존이 결핍된 의미화(signifi-
cation)의 `과정'인 셈이다.
그렇다면 기호는 왜 완전한 현존이나 재현이 되지 못하는가? 데리다에 의하면 그 이유는
(차연) (differance)개념에 의해 설명된다. 그에 의하면(차연)은 두 가지 의미-(차이)
와 (지연)-를 지니고 있는데,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지시
물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필연적으로 상호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자립된 상태로 현존할 수
없으며, 이는 나아가 또 다른 텍스트의 요소들과 연결된다. 이런 과정으로 인해 (의미)는
영원한 (차이)를 갖게되고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텍스트성(textuality)및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의 이론이 생겨난다.
데리다는 하늘/땅, 자연/문화, 서양
/동양, 정상/광기, 저자/독자, 의식/무의식, 정신/육체 등의 전통적인 이분법적 대립을
(폭력적인 서열제도)라고 부르면서, 이 양자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보충과 대체)의 관계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헤겔, 마르크스 이래 변증법적 논리의 골간을 이루어왔던 것이다.)
결국 데리다는 이를 위해서 기존의 이성중심주의의 서열적 구조를 그 근본으로부터
해체(deconstruct)하게 되는데,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로부터 후기(또는 탈)구조주의의
이론적 장점이라 할 수 있는 데리다의 해체론은 자기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반대하는 전통의 사고 관습과 언어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가령 어떠한 형태의 청산주의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지는 못한다.
실제로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텍스트의 불확정성과 무한한 해석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언어의 자유 유회)라고 표현하는데, 이럴 경우 (중심) 또는 (현존)과 그것의 해체의 (유희)
사이의 관계가 문제가 된다. (중심)이 이미 없는 텍스트는 (해체)될 수 있는가?
아니면
거꾸로 해체의 (유희)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을 미리부터 가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지점에 이르게 되면 데리다가 구조주의와 완전히 결별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상당부분 구조주의의 연장선에 놓여있다는 인상을 받게된다.
사실상 데리다는
형이상학을 공격하면서도 형이상학의 용 들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고, (근원)을 부정하기
위해 사용된 (자취)의 개념을 정의하면서 그는 (근원의 근원) (origin of origin)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렇게 보면 형이상학의 닫힌 체계를 깨뜨리려는 그의 시도도 다시금
그 전통을 부활시켜놓고 그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유입되어 버리는 셈이 되는데, 이로
인해 그의 새로운 시도의 성공(가능성)역시 영원히 (유보)될지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여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역시 후기구조주의의
대표적 인물의 하나였던 푸코는 (글쓰기)란 곧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
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어 권력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데라다가 끝내 텍
스트성 內에 갇히게 되면서도 텍스트의 해체를 주장했던 자기모순에 처하게 되었던 데에
비해 푸코는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로 나아감으로써
텍스트의 안과 밖을 넘나들 수 있었다.
필자가 보기에 푸코는 텍스트와 언어 그리고 그것에
의해 산출되는 지식의 외부에 항시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일단은
해체론의 자기모순의 원인이었던 언어의 감옥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푸코가 발견한 역사, 언어의 감옥 너머에 편재해 있는 역사는 일정한 방식으로 그 내용을
제거당한 `추상적인' `권력'의 역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