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 형식주의의 인식론적 지평과 올바른 예술방법의 단초.

심광현(서울미술관 기획실장)


Ⅰ. 머릿글
Ⅱ. 포스트모더니즘
    1) 미적 질서와 개념에 있어서의 단절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자기 모순 -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론

    3) 지식(또는 인식)과 권력
    4) 권력에 익명성과 주체의 부재
Ⅲ. 리얼리즘
    1) 권력의 도구로서의 재현
    2) 포스트모더니즘 소비사회
    3) 구체적인 사회생활로서의 역사에로의
        복귀

    4) 리얼리즘의 방법과 예술의 진보성

전 망

3) 구체적인 사회생활로서의 역사에로의 복귀

그러나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게 되면, 상품생산과 소비의 메카니즘이 한 사회 내의 모든 주체를 완전히 삼켜버릴수 있고, 또한 그들 모두가 정신분열적인 상태에 함몰되어 역사감각을 완전히 상실토록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지나핀 가설임을 알게된다.

물론 특정 기간 동안 특수한 조건하에서 그러한 '경향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 실이며, 또한 바로 그것이 자본의 논리임은 분명하나, 그것은 단지 특수한 역사적 조건, 가령 1960년대 이후 서구 선진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내에서의 일정한 '경향성'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일정한 경향성을 절대적 현실성으로, 또한 특정한 역사 적조건 하에서 일시적으로 가능한 현상을 일반적인 조건 하에서 보편적, 항구적으로 현존하는 필연적 법칙인양 확대, 과장하는 데에서 나타난다. 제임슨의 경우는 1960년대 이후 서구의 특수한 문화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을 후기자본주의의 새로운 사회·경제적 질서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한다는 기슬적 목표에 의해 미리부터 분석이 구체적으로 한정지워짐으로써 그러한 일반화와 확대해석의 위험을 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푸코만 하더라도 (권력의 익명성) (주체의 대상화)과정은 지나치게 일반화되고 확대해석됨으로색 결국 그가 애써 세련되게 만든 개념과 범주들은 그 구체적 내용을 상실한 추상적인 형식적 분석기제로 화해버리고 말았으며, 나아가 데리다와 바르트의 해체론과 후기구조주의 이론 일반의 경우에는 그러한 일반화가 다시 초역사적 차원으로 확장됨으로써 과학적 이론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시금 형이상학의 지평으로 퇴행하고 말았다.

대다수의 상기한 이론가들이 100년전의 니이체의 사상에 상당히 의존하거나 또는 전적으로 회귀한다는 사실도 따라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제임슨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들을 분석해본 결과 그런 특징들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라고 결론지웠다. 그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의 급진적인 단절이 실제 로는 내용상의 완전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주어져 있던 특정한 일련의 요소들의 재구성을 의미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이전 시기의 체계 내에서는 부차적이었던 특징들이 이제는 지배적인 것이 되고 지배적이었던 것들이 다시금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본질적으로 양 시기 사이의 내용상의 변화가 아니라 형식적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며, 형식-즉 요소들의 배열 방식-상의 단절 이면에 내용상의 연속성을 함축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구조주의든 후기(또는 탈) 구조주의든-모더니즘이 든 포스트모더니즘이든-각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자본주의의 발전및 그 운명 속에서 태동, 전개되어 왔던, 일정하게 역사적으로 조건지워진 철학적 형식주의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자명한 일이다.

연속성-불연속성, 중심-주변, 구조화-탈구 조화, 일치-차이, 기원-혼적 등의 이항 대립에서의 상호 이행은 항시 언어의 모델, 언어사용의 형식, 텍스트성, 담화의 형식 내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러한 양극 중에서 두번째 극을 발견한 것을 후기구조주의의 큰 성과이자 새로움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대립관계는 이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철학사에서 빈번히 나타났었으며, 특히 칸트와 헤겔에 이르는 독일관념론 철학에서 현저하게 규명되고 천착되었던 범주적 연관들의 일부일 뿐이다.

이러한 연관은 관념론의 오랜 전통 속에서 종종 나타나는 객관적 관념론과 주관적 관념론 사이의 극적인 반전이며, 목적론과 불가지론사이의 악순환의 기나긴 연쇄과정 상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이들 모두에게 공통된 특징은 객관적 현실 세계의 인간 의식에 대한 독립성과 일차성을 인정하지 않으며,따라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체적인 역사적 삶 속에서의 객관적 세계와 주관적 의식간의 변증법적인 발전관계를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때문에 지시물은 배제된 채, 미끄러지는 기의와 부유하는 기표의 부단한 상호이행만이 현기증나게 되 풀이될 뿐이다. 그러나 이는 초기의 를랑 바르트의 정당한 지적과도 같이 정치적 실천을 거부하는-실제로는 그 거부행위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실천인 셈인-쁘띠부르조아적 세계만의 자기 탐닉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중심-주변, 기원-차이의 대립문제 역시 사실은 객관적인 실재와 인간의 의식간의 일치와 불일치의 변증법적 관계상의 한 국면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인간은 자의적으로-또는 히스테리칼하게 -동일성이든 차이이든 그것들을 주관적 의식 내에서 양자 택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러한 양자택일에 의해 객관적 현실의 변증법적 운동이 지워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기호와 언어가 아무리 독립적이고 자율적이고자 해도 그것은 결코 객관적 지 시물로부터 완전히 지유로울 수는 없다.

푸코는 정당하게도 기호적 재현이 현실적인 권력의 도구임을 직시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역사와 인간의 사회적 삶의 과정은 권력의 미세한 그물망이라는 범주에 의해 추상적으로 일반화되기에는 너무도 깊고 다양하며 풍부하고 역동적이다. 구체적인 사회생활은 익명적인 권력의 관계망에 의해 영향받을 뿐만이 아니라 권력의 그물망 자체도 그것을 담지하고 그 기능을 수행하는 개개의 주체, 집단적, 계급적 주체들의 능동적인 의식과 실천에 의해서도 양적·질적 변화를 겪는다.

우리는 텍스트와 기호 자체 내에 실재하는 기표와 기의 사이의 모순과 불일치를 깊고 풍부하게 관찰하여 글쓰기와 해석의 논리를 보다 정밀하게 규명해야 하지만, 나아가 텍스트와 현실, 기호와 지시물 간의 모순, 객관적 현실과 인간의 의식적 활동 사이의 모순, 그리고 그 모순의 역동적 '발전'을 올바로 주목함으로써만 비로소 우리의 의식과 객관적 현실의 총체적인 모습을 이해할수 있게 된다. 실제로 인간의 의식 -감각적 인식과 논리적 인식-의 발전 역시 객관적 세계의 풍부한 운동과 의식 사이의 변중법적 모순의 추동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이와 같은 변증법적인 모순의 운동과정 속에서 형성되며, 이러한 올바른 인식태도는 리얼리즘이라는 명칭으로 불리 워왔다. 이와 같은 을바른 태도는 우리의 고도화된 의식을 현실 역사 속의 생동하는 구체적 사회생활 속으로 되돌려 보내준다.

물론 언어는 실재와 직접 연결되지 않고 사유과정을 매개로 연결된다. 따라서 특정의 물질적 대상을 그에 해당하는 단어와 직접 연결하는 일이 쉽지 않을 때도 있다. 이런 이유로 언어는 실재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환상이 생긴다.

그러나 단어들은 인간에 의해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단어들은 인간의 인식과 실천활동 과정을 통해서 객관적인 대상및 현상들과 긴밀하게 결합된다.

이러한 객관적 과정들은 단지 환상적인 단어구사에 의해서는 바꿔지거나 제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환상에 집착할 경우 그것에 매인 주체들만이 스스로의 객관적인 실천과 인식 능력을 손상하게 될 뿐이다.

오히려 올바른 인식은 비록 객관적인 물질세계의 반영을 토대로 출현했지만, 역으로 객관적 과정의 발전을 촉진하는 데에 능동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이 객관적 세계를 총체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객관적 과정의 역동적인 발전에 능동적인 영향을 미 치는 변증법적 과정으로부터 풍부하고도 유용한 과학적 인식과 예술적 형상화가 출현 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