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더니즘과 리얼리즘 : 형식주의의 인식론적 지평과 올바른 예술방법의 단초.

심광현(서울미술관 기획실장)


Ⅰ. 머릿글
Ⅱ. 포스트모더니즘
    1) 미적 질서와 개념에 있어서의 단절
    2) 포스트모더니즘의 인식론적 방법론과 자기 모순 -
        후기 구조주의와 해체론

    3) 지식(또는 인식)과 권력
    4) 권력에 익명성과 주체의 부재
Ⅲ. 리얼리즘
    1) 권력의 도구로서의 재현
    2) 포스트모더니즘 소비사회
    3) 구체적인 사회생활로서의 역사에로의 복귀
    4) 리얼리즘의 방법과 예술의 진보성

전 망

전 망

애당초 역사의 연속성, 역사의 진보를 거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화적 태도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며 전적으로 그릇된 것만도 아니다. 일면적으로는 그들의 역사관에 정당한 측면이 존재하고 있는데 실제로 역사의 진행에는 불연속적이며, 퇴보적이고 단절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은 이미 18-19세기 부터 관념론 철학에 의해 단 속적으로 주장되어 왔으며, 특히 니이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그 단적인 표현이다.

실제로는 역사의 진행이란 연속과 불연속(비약)이라는 서로 대립되면서도 긴밀하게 상호연관된 두 측면 또는 두 단계의 통일로 나타난다. 발전에 있어서(연속성)은 느리고 감지하기 힘든 양적 축적의 과정을 함축하고 있으며, 이는 대상의 (질)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지만 그 대상의 (양적) 변화를 일으킨다.

반면 (불연속성)은 어떤 대상에서 근본적인 (질적)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과 단계로서 낡은 질이 새로운 질로 이행하는 순간들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무시하는 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현실의 발전과정을 왜곡하고 형이상학으로 빠지게 됨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형이상학자들은 -또한 부르조아 세계관은- (질적) 발전을 무시하고, 발 전을 항시 감지하기 힘든(양적) 축적으로 환훤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형이 상학적 사유노선을 따라 사회발전을 비약이나 혁명, 또는 단절이 없는 순수한 연속과정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은 구조주의자들과 모더니스트들의 역사철학에서 쉽게 찾 아볼 수 있다. 그에 반해 객관적인 현실에 있어서 (양적) 발전을 부인하는 태도는 인식론적 무정부주의의 -쁘띠부르조아 세계관의- 전형적인 이론적 기초이다. 이들은 양적 축적이 없는 질적 비약만을 (유토피아) 맹목적 로 기대하며 또는 완전한 단절을 가정한 채 파편적 고립상태에서 자포자기의 지적쾌락에만 몰두한다.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이 론적, 세계관적 기초는 대채로 이와 상응한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리얼리즘적인 역사이해는 연속과 불연속성을 역사발전의 불가 결한 상호모순적인 통일적 과정의 두 계기로 파악한다. 이러한 모순적 과정을 통해 역사는 진보한다. 그러나 역사 발전의 진보적 성격은 그룻된 '역사주의'의 오해와는 달리 일직 선적인 운동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나선형의 과정을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는 때로는 이미 지나간 단계들이 일정하게 반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단계들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즉 좀더 높은 기반 위에서 되풀이 된다. 말하자면 이 반복은 결코 낡은 것으로의 실질적인 복귀가 아니라 새로운 것의 출현을 위한 양적축적을 의미한다.

하지만 객관적 실재로서의 구체적인 역사과정의 나선적 진보의 발전은 항시 저절로, 즉 인간의 목적의식적인 주체적 활동과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나선적 발전형식은 실질적으로 그 발전의 내용을 이루는 인간 주체들의 사회적 관계내에서 작 용하는 모순과 갈등을 통해 촉진되기도 또는 억제되기도 한다.

특히 그중에서도 계급적 관계는 주요한 사회 발전의 동력 또는 장애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때문에 사회생활의 진실을 깊고 풍부하게 반영하면서 나아가 생활의 진행과정에 능동적인 각인조차 남길 수 있는 리얼리즘적인 예술형상화에 있어서 인간의 주체적 활동관계, 특히 계급적(그리고 민족적) 갈등과 모순관계는 그 내용상의 심오함과 역동성의 성취에 있어서 주요한 관건이 된다.

이렇게 사회생활의 심층부를 폭넓고 풍부하게 반영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리얼리즘의 예술은 자연스럽게 정치성을 띄게 되며, 그러한 정치성의 현실적인 내응은 바로 민중성 계급성, 당파성의 복합적인 층위와 관련되게 된다. 따라서 사회생활의 진실을 폭넓고 풍 부하게 반영하려는 리얼리즘 예술에는 그 사회 내의 물질적 생산관계에 기초하여 그를 조직하고 또 그에 저항하는 주체들의 정치적 실천의 핵심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우리의 현대미술은 1980년을 전후로 해서 비로소 사회생활의 객관적 과정과 그 과정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적 갈등 문제를 반영하고 또한 단순히 그런 사실을 재현해낼 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과정의 모순적 발전에 일정한 작용을 가하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형성된 민족민중미술운동은 아직 리얼리즘 예술방법의 풍부한 성과에 도달한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이는 저간의 우리 미술계 내부의 열악한 조건및 전반적인 정치사회적 질곡의 부정적 영향에서 기인했던 것 같다. 특히 미술계 내부에서는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이행의 문제가 올바르게 파악, 반성되지 못했고 그러한 파행적 수용에 따른 혼란 등으로 인해 리얼리즘적 예술창작방법의 필요성조차 크게 절감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 전사회분야에서 민주화에 대한 본격적인 요구가 제기되고 있는 현상황은 우리의 객관적인 역사적 현실과 문화예술적 역량의 모습을 진보적인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런 지점이야말로 리얼리즘적인 현실파악에 있어서의 질적 비약의 단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비약은 이제까지 소박한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민족·민중미술운동이 90년대를 향해 전진하는 민족민주운동의 새로운 과정에 적극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지의 여부와 새로운 민주주의적 미술문화의 미학적 질을 고양시킬 수 있을지의 여부를 결정지울 관건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