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소비에트)미술의 변천

유준상(전 학예연구실장)


I)서론 Ⅱ)혁면전의 러시아미술 Ⅲ)러시아 · 아방가르드 Ⅳ)사회주의 리얼리즘 V) (페레스트로이카)이후 Vl)결론

사회와 예술

(미술작품 그자체는 그 구성과 표현방법속에 예술적가치에 비례되는 독자적인 다이 나미즘의 존재이유가 있다.

위대한 작품, 힘있는 걸작등은 이러한 정신을 집약하는 것 으로서 그것으로서 하나의 사회를 구성하며, 그자체가 사회의 법칙이 되고 중계자가 된다)고 E.수리오는 그의 (예술과 사회생활)에서 말한바 있으며, 애술사회학의 입장 에서 작품(作品)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일러둔바 있었다.

창조로서의 미 술작품은 창작자로부터 나온다고 하겠는데, 창작자의 본질은 유니크한 본래적인 의미 로서의 개별성(個別性)에 있으며 일회적인 천재를 가리킨다는게 통념으로서의 미술사 이다. 그러나 사회적연구의 방법은 창작을 일반적보편적인 필연적과정으로 환원시킨 다는데 있다.

이 경우 그러면 창작자로서의 예슬가는 사회적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가의 문제가 제기되며, 결국 예술가란 사회적인가의 의문으로 귀결된다고 하겠다. 그 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회적)이라는 뜻은 경제학이라든가 정치학으로 환원시킨다는 것 과는 구별되야 한다는게 예술에 관한 기본인식이며, 금세기의 예술학자들은 모두 여기 서부터 그들의 관심을 유발시켰던 것이었다.

사회과학(社會科學)은 현실의 과제이기때문에 발전, 개혁, 변환, 전진따위로 인식되 는 구조적기능과 적확정밀한 구조형식으로 나타나는 현실권리인 반면에, 문화과학(文 化科學)은 현실보다도 이상을 추구하는 과제라고 하겠다.

여기서 사회과학의 현실적과 제로서이 실천(實踐)이라는 측면으로 좁혀서 사회과학자(정치가, 경영가, 사회운동가 등등)의 사회적역할에 대해서 먼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세가지 유형으로 역할 에 관한 인식을 분류해볼 수 있다.

첫째 정책결정자로서의 다스리는 입장이 정치가이 다. 이른바 디시젼메이커들이며 정부의 고위책임자들이 이 유형에 속한다. 이들은 조 직의 관리자 또는 지도자들이며 정치적 기술을 익힌 테크노크라트이지만 이른바 [결과 책임]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다음은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경험한 예시로 서 설명하면,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정치적기술을 익힌 사회인식자로서의 테크로크 라트였다기보다 후자에 속하는 사회사상가였던 셈이다.

이상의 두 유형의 사회과학은 기구(機構)와 조직(組織), 그리고 사상(思想)만으로 구성되는 사회모형이 상정된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조직기구만으로는 상황적응을 위한 유동성(流動性)인 피드백 (feedback)의 복원기능(復元機能)을 상실한다는 위험이 따르기마련이다.

한 사회를 선체(船體)로 비유해볼 경우, 진로의 방향이라든가 속도 화력(에너지)의 재원을 확보 하는건 정치경제로서의 사회과학이 담당하지만, 그 선체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않게 안전성이 있는 복원의 기능을 부여하는건 문화과학의 역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조직)과 (권력)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주체적유통층의 역할과 그 필 연성에 대해 사회과학이 주의하기 시작했던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역할로서의 사회인 들을 칼, 만하임은 (자유롭게 유동하는 지식인)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앞에서 예시한 (유니크란 본래적인 의미로서의 개별)이 이러한 자유로운 인식자들인것이며, J.호이 징하의 말처럼 (역사적 사상)에 구현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어떤 (법칙(法則)이나 정 식(定式)이 아니라 생명(生命) 그 자체이다)라고 하겠으며, 고도의 선진국들이 사회와 문화의 갈등을 이러한 유동충의 내용적가치관(內容的價値觀)애 위탁하는 문화정책을 시행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주지하는 바처럼 유럽의 근대사회의 탄생은 [중성국가(中性國家)]라는데서 그 커다 란 특색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사회제도는 진리라든가 도덕, 예술등인 내용적가치에 대해서는 국가는 중립적입장을 취하며, 그러한 가치의 선택과 판단은 모름지기 그 자 율집단(미시사회=micro-society=가령 교회라든가 (누가) 또는 (길드)같은 예술단체) 혹은 개별(個別)의 양식(良譏)에 위임한다는게 특색이다.

따라서 국가주권의 기초는 이러한 내용적가치로부터 사상되어진 순수하게 형식적(形式的)인 법기구(法機禱)위에 두었던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18세기경부터 이러한 사회체제를 표방하기 시작했던 유 럽의 근대사회는, 지난 중세기부터의 그 길고도 어두웠던 신학논쟁(神學論爭 또는 보 편자논쟁)을 종식케 했었던 것이며, 각 종파 또는 이익집단이 신조로하는 정치적관철 을 단념케 했던 것이었다.

이로부터 절대권력으로서의 내용적정당성을 독점하려던 절 대군주제는 퇴색하기 시작하며, 그 지배근거로서의 공공성의 질서는 외적형식(外的形 式)으로만 남게 된다. 그리하여 형식과 내용, 공적(公的)인 것과 사적(私的)인 것이 분화되기 시작하며, 치자와 피치자간의 타협이 이뤄지고 예술의 문제는 개별의 주관적 내면성으로 보장되는 한편 공권력은 기술적성격으로서의 법체계속으로 흡수된다는게 근대의 사회과학인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천을 미술의 역사로 이입하면, 성상(聖 像)만을 되풀이 그려왔던 그 길고 긴 중세의 유형이 종식되고, 다양한 스타일의 백화 만발이 근대미술사를 수놓기 시작했다는게 되겠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사회모형은 어디까지나 유럽의 중심부에서 실현된 변천사인거 며, 러시아는 아직 유럽문명권밖의 무중력공간을 유영하던 무명의 한 혹성에 불과했 다. 이것이 19세기당시의 러시아였다.

한편 이러한 소외감은 러시아의 인테리겐치아의 의식속에 (역사적니힐리음)으로 불 리는 이지역 특유의 허무사상을 배양시켰던거며, 조국에 대한 뿌리깊은 사랑에 못지않 는 또 하나의 사랑, 곧 (유럽문명의 젖줄) (bosom of contemporary European civilization)을 그리워하는 유년기중세를 잉태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거를 벗어 버리고 20세기의 중요한 미술운동의 하나를 폭발적으로 전개시키는게 혁명을 전후한 (러시아 아방가르드)운동이다.

슈프레마티즘 또는 구성주의로 알려진 이 운동은 타트 린, 마레비치, 로드쳉코, 칸딘스키등의 이름과 함께 우리들에게도 친숙하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을 단명으로 끝난다. (사회주의리얼리즘)의 대두가 이것을 거세했기 때문 이다. 1930년대의 일이다. 전후의 소비에트를 W.리프만은 정치적뉴앙스로서 [철의 장막)으로 비유했는데, 세계 미술사적으로는 이무렵부터가 닫혀진 공간이 된다.

이러 한 소비에트의 닫혀진 장막이 잠시나마 겯히는건 이른바 [해빙(解氷)]이다. 당시의 비에트는 [비공인(非公認=unofficial)예술가]라는게 있었으며 관제예술에 반대하여 지 하에서 독자적인 작품을 시도하는 작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해빙)과 더볼어 싹트는 현상처럼 비공인의 지하로부터 지상으로 나오며, 그간에 실험했던 작품들을 햇빛아래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시장을 방문한 후루시초브서기장은 뜻밖의 반응 을 보인다. [이건 도대체 뭔가?사람의 손으로 그린건가, 또는 당나귀꼬리로 더덕더덕 바른건가?‥‥]후르시초브서기장의 심기는 극도로 악화되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이른 바 (당나귀꼬리논쟁)이라는게 제기되며, 예술창작에 대한 정풍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1962년의 일이며, 솔제니친의 [이완 테니소비치의 하루]가 발표된 얼마후인, 12월의 모스코 붉은 광장에서 얼마 안떨어진 (마네즈전시관)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당나귀 꼬리)는 부레즈네브의 강권으로 결국 탄압되지만, 소비에트가 오랜 문화적정체를 깨고 경험하게 되었던 가치논쟁(價値論爭)이었다는데에 의의가 있었다.

굳게 얼어붙은 안전 보다는, 빠지는 위험이 있어도 해빙의 흐름이야말로 인간사이기 때문이다. 본론은 여기서부터 (러시아미술)의 흐름을 추적하게 된다. 다만 서술대상의 현장성 을 살리기위해 년대기 (年代記)적인 기록소개는 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