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후데마스(Vkhutemas)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가운데서 또하나 빼놓을 수 없는건 (부후데마스)인 고등예술
기술공방(高等藝術技工房)제도이다. 독일의 (바우하우스)(1919)의 조직과 기능을
본뜬 예술교육기관으로서 1920년말에 발족되었다.
(부후데마스)의 목적은 [국민경제
에 이바지하는 우수한 예술가를 육성할것](레닌)이라는 간결한 취지가 설립동기였고,
실제로 이것의 필요성을 강조한건 다름아닌 칸딘스키였다. 독일의 (바우하우스)(그는
여기의 교수였다)같은 혁신적이고 과학적인 예술교육기구가 그의 조국에서 실현되는
걸 갈망했기 때문이다.
즉 예술상호간의 상보적관계와 독자적분과의 탐구와 실천을 영
위하고 실험기구를 혁명후의 러시아에 실현한다는게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붕괴된
제정러시아의 교육기구를 접수한 혁명정부가 이에 걸맞는 혁명적 교육프로그램을 찾
고있던 때였다.
이러한 (부후데마스)와 연계되는 (인푸쿠)(예술문화연구소)는 주로 이론적추구로서
의 관념적인 예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칸딘스키는 사표를 내며 [인푸크]
는 1924년 폐쇄된다. 이념과 실제, 과학과 이데올로기등이 엇갈리는 의견의 난무가
일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술이 쌓올린 경험의 뜻을 스스로가 해체
하고 거부하는 것같은 급진적이고 도그마적인 의견대립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지적(知的)으로 통일된 교육프로그램을 제어단위로 조직된 (바우하우스)하고는 달
리, (부후데마스)는 혁명적열기의 로맨티시즘이 환상적으로 허공에 그린 신기루였다.
여기의 교수로서 전기한 칸딘스키 그리고 로드쳉코 포포바등 낮익은 이름들도 있었지
만, 도그마를 휘두르는 혜게모니쟁탈의 독주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현실의 대중이 필요
로 하는 것에 예술가는 얼마만큼 실효성있게 기여할 수 있는가? 등으로 시작된 관념적
인 예술논쟁은 주로 (인푸크)에서 제기되었으며, 이러한 이데을로기상의 충돌에 절망
감을 느낀 칸딘스키는 (부후데마스)를 떠나게 된다.
칸딘스키가 (부후데마스)에서 실험하려 했던 주제를 참고하면 이렇게 요약된다. 예
술의 보편성이라는 원리에 입각한 그는, 예슬이라는 것이 수학적, 상보적체계속에, 정
위(定位)되어지는 각개의 부위(部位)로 환원된다는걸 밝힌바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
위가 인간의 심신(心身)에 어떤 반응을 이르키는가의 관점에서 표현매체를 분석한다는
게 그의 교육프로그램이었다.
(예술의 각분야를 비교측량해서 그 본질과 가치를 해명
하고, 나아가 각분의 고유한 카텐고리를 분석한다. 그리하여 각분야를 하나로 통일
한다. 이것은 각분야가 개별적으로 안고있는 문제점을 심층적으로 연구하는 가운데서
문제를 풀어내는 같은 열쇠로서의 방법론(方法論)을 학습을 통해 쟁취하려는데 있다).
칸딘스키의 추상적구성은 음악(音樂)의 비대상적인 독자요인의 구조형식을 응용한
세계라는건 그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서도 천명된바 있다.
그러니까 미술
을 같은 예술장르인 음악의 영역으로 비교측량하는 방법론적 발상으로부터 출발한게
그의 예술관이었다. 이것은 일찍이 P.바레리가 말한 [정신의 단일사(單一史))로서의
근대적발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 바레리는 (철학, 예술, 문학, 과학에 관한 개별적
인 역사는 정신의 여러 사항에 관한 단일의 역사로 재정리되어 기술(記述)될 것이다)
고 했다. 즉 예술의 독자적분과가 영역(領域)분과로 침수하여 하나로 종합되는 인터디
스프리너리 (Interdisciplinary)를 뜻한다.
이러한 칸딘스키의 근대적이상은 이데올로기의 도그마에 의해 파열되며 (부후데마
스)는 1927년 국립고등예술기술연구소(부후틴-Vkhutein)로 개칭 국가가 관리하면서
약화된다. (이데오로기)와 (생산디자인)이라는 이중의 가치기준이 쉴날없는 논쟁으로
되풀이되었던게 일과였으며, 여론도 (부후데마스의 타락)을 보도하고 있었다. 1930년
문을 닫는다. 지난날의 노농사회가 급진적인 혁명세력에 의해 추진된 산업근대화의 초
기과정에서 빛어진 「고난의 도정」(보지에니에·보·무감)인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