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정의
1971년 런던의 해이워드미술관은 소비에트당국과 교섭이 성공되어 (혁명예술)전이
라는걸 개최한바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아방가르드)가 진열된 전시실은 "추상적이고
퇴패적"이라는 이유로 소비에트문화성관리에 의해 끝내 폐쇄된다는 사건이 있었다.
또 다른 예로는 1977년 미국의 매트로포리턴에서 시도한 (러시아·소비에트 회화)전에서
도 이콘과 사실주의 그리고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소개되었을뿐 아방가르드는 불과 몇
점이 구색을 맞추는걸로 끝났다고 한다.
보다 획기적인 기획으로는 전시구성의 세계적
일인자 P. 훌텐이 파리의 퐁피두근대미술관에서 개최했던 (파리·모스코전)(1979)이었
는데 여기서도 아방가르드와 무관한 작품이 전시되었고, 기록으로서의 간접매체들이
벽면 가득히 전시되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보다 비근한 예로는 1980년 미국 L.A의
카운티미술관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1910∼1930)전인데, 여기서는 소비에트당국과
의 교섭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서방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작품만으로 전시를 꾸몄다고
한다. 이상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러시아·아방가르드)가 하나의 전체적위상으로
구성되어 가시적대상으로서의 전시유형으로 실현된 예가 없다는 것이다.
이점은 미술
관 또는 갤러리의 큐레이터들에게 계획과 실천사이에는 뜻밖의 마찰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걸 환기시킨다고 하겠으며, 전시 (展示)는 이러한 마찰(Friction)의 극복을 통
해 실현된다는걸 시준한다고 하겠다. 때문에 전시유형으로서의 (러시아·아방가르드)는
적극적이면서 전략적인 큐레이터들의 야심을 촉발시키는 전시소재로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에게 친숙한 러시아 미술은, 1910년대의 혁신적경향이며, 여기서
(아방가르드)로 통칭하는 미술가와 그들의 작품이다. 칸딘스키, 타트린, 마레비치, 곤
차로바, 가보, 로드쳉코, 라리오노브, 포포바, 피로노브, 샤갈등은 우리들에게 친숙해
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혁신적이고 실험적이며 독창적인 전위의식에
있다고 하겠다. 미술사가들은 1910년의 (큐보-미래주의)(Cubo-Futurism)의 이름을
들어 (러시아·아방가르드)운동의 효시로 보지만, 이것은 기술(記述)로서의 편리때문이
며, 실제로는 입체파나 이태리의 미래주의에 대한 사상적공감은 있었어도 그 앙식을
실천한 예는 매우 드물다.
오히려 [내부(內部)의 표출(表出)) 이라는 뜻에서의 [표현
주의)에 긴밀하고 횡적인 유대가 있었던거며, 때문에 하나의 규율 또는 이름이나 양식
으로 종합될 수 없었던 것이다. 각기는 각기의 양식대로 전개했던거며, [러시아·아빙
가르드]의 본질은 여러가지 양식이 공존하는 병열(竝烈)의 집합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그리고 이런 뜻에서 이들은 진정한 전위병사(前衛兵士)들인 것이었다. 주지하는데로
(아방가르드)는 프랑스어의 군사용어의 전용인거며, 한 집단의 최전방에서 본대의 진
로를 살피고 결정하는 정예분자를 뜻한다.
본대를 멀리 이탈하여 적전에서 전방의 동
향을 살피는 [전우]가 믿는건 오직 자신의 의식(意識)밖에 없다. 이러한 의식이 어떻
게 흐르는가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 순간의 긴장감이 근대미술의 정예분자에게
도 요구된다는 뜻에서 이러한 비유가 나왔다. 의식은 흐름이며 어떤 결과로서의 이즘
이나 양식 또는 고정관념은 아니다. (러시사·아방가르드)를 이러한 인식유형(認認類
型)으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1910년 당시의 러시아는 5년전의 제일차혁명으로 사회가 혼돈했고, 시베리아유형과
망명이 잇따랐으며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적비판)(1908)이 출간되고 베르자에브의
(인테리겐치아의 정신적위기)(1910)가 소리높이 토의되던 때였다. 초기자본주의의 난
숙은 유럽에 불가피한 전운을 몰고 오던 때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전개시킨
이들의 (아방가르드)는 [매우 높은 차원의 실험과 모든 예술의 이종교배(異種交配)로
특징지워지는 운동이였다) (S. 바롱). 1917년 혁명을 전후한 러시아에서 개화된 아방
가르드는 비단 미술뿐 아니라 연극, 영화, 무대장치, 사진, 문학, 디자인 그리고 건축
의 각분야에 걸친 혁신운동이었으며, 관념적인 창조가 아니라 생산(Pro-creation)이
운동의 정점이었던거며, 실용적이고 일상적인 기능을 고려했던 운동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인 스탈린의 독제체제가 수립되면서 이 운동은 종식되며 단명으로 끝나게 된
다. 1980년대인 페레스토로이카이후의 러시아는 이 지난날의 혁신운동을 다시 계승하
게 되며, 스스로를 (포스트·아방가르드)로 자처하다. |